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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미천왕은 도망쳐 온 평주 자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최비는 환대에 감격하여 충성을 맹세했다.
국왕은 자사로부터 요서 사정을 상세히 들은 후 국상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구상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요서는 물론 요동까지도 모용씨의 판도가 될 겁니다. 군사를 보내 모용부의 확장을 막아 내야 합니다.”
국왕도 국상의 생각에 동의했다.
“누구를 보내는 게 좋겠소?”
“장군 여노(如孥)가 마땅합니다.”
여노는 용맹이 뛰어나고 전장에서의 경험도 많아 큰일을 맡길 만한 장수였다.
미천왕은 여노에게 군사 5천을 주어 변경에 있는 하성(河城)으로 보내기로 했다.
고구려군이 출정하는 날 창조리가 여노를 따로 불러 당부했다.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성격이 불같아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용부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면 함부로 나서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며 구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게나.”
여노는 그리하겠다고 다짐했다.
고구려군이 하성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외는 평주부에 주둔한 모용황을 극성으로 불러들였다.
“고구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구나. 어찌하면 좋겠냐?”
“예부터 고구려는 요서 땅을 호시탐탐 노려 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저들의 기세를 꺾어 다시는 넘볼 생각을 못 하도록 하십시오.”
모용외는 고구려군을 상대해 본 경험이 풍부한 장통에게 하성을 치게 했다. 그는 군사 1만을 이끌고 고구려 땅으로 내달렸다.
모용부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여노는 창조리의 충고를 떠올렸다. 그는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하성은 성벽이 높고 견고하여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용군이 여러 차례 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장통이 답답해 하고 있자 부장 설현(薛賢)이 계책을 내어놓았다.
“하성의 수장인 여노는 아름드리나무를 송두리째 뽑을 만큼 대단한 용력을 지닌 자이나 성미가 급하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입이 거친 군사들을 보내 그를 자극한다면 반드시 성문을 열고 뛰어나올 겁니다.”
장통은 군사들을 시켜 성을 향해 욕을 퍼붓게 했다. 이를 듣고 분기탱천한 여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 저놈들의 주둥아리를 당장 박살 내 주리라.“
부장 파성(把盛)이 다급히 말렸다.
“국상께서 친히 당부하시지 않았습니까. 구원군을 요청했으니 도착할 때까지만 참으십시오.”
“내 무엇이 무서워 참는단 말이냐!”
일단 화가 치민 여노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철퇴를 집어 들고 성문을 뛰쳐나갔다. 파성은 할 수 없이 군사들을 이끌고 여노의 뒤를 따랐다.
여노를 맞이한 장통은 싸우는 척하면서 슬슬 약을 올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고구려 장수는 당장 요절을 낼 기세로 적장에게 달려들었다.
장통은 여노가 휘두른 철퇴를 몇 차례 튕겨내다가 창을 놓치고는 황망히 달아났다. 기세가 오른 여노는 장통의 뒤를 추격했다.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길옆 수풀 속에서 화살이 날아와 말의 목덜미에 꽂혔다. 말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앞다리를 번쩍 드는 바람에 여노는 말에서 떨어졌다. 이 틈을 놓칠세라 매복해 있던 모용의 군사들이 뛰어나와 누워 있는 여노를 에워싸고 포박했다.
여노가 잡히는 걸 본 파성은 말을 채찍질해 구하러 갔다. 하지만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적병들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됐다.
금속성의 충돌음과 단말마의 비명을 뚫고 몸을 빼 달아난 파성은 가까스로 성문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성벽 위에서 모용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여노가 성 밖으로 달려 나간 사이 모용부 장수 설현이 성을 차지한 것이었다.
파성은 할 수 없이 살아남은 군사를 수습해 도성으로 돌아갔다. 미천왕도 더는 군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서력 247년 신라에서는 조분왕(助賁王)의 뒤를 이어 골정(骨正)의 아들 첨해가 왕위에 등극했다. 이가 바로 신라의 12대 임금인 첨해왕(沾解王)이다.
첨해왕이 등극한 지 7년이 되던 해 왜왕의 총신인 갈나고(葛那古)가 사신으로 신라에 왔는데 그 태도가 자못 거만했다.
신라의 대신들은 사신의 방자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양국의 우호를 생각해 참았다. 백제와 같은 강국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접견을 끝낸 왕은 서불한 우로에게 명해 사신을 접대하게 했다. 우로는 왜의 사신을 객관으로 데려가서 주연을 베풀었다.
갈나고는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거만하게 큰소리쳤다.
“지난날 아군이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우리 왕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분수도 모르고 우리 왕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겠느냐.”
사신의 모욕적 언사는 참고 있던 우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갈나고의 뺨을 후려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 어찌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더는 못 들어 주겠구나!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썩 물러가라! 조만간 네 나라로 쳐들어가서 너희 왕을 염전의 노비로 삼고 왕비를 요리하는 시녀로 삼을 것이다!”
우로의 불호령에 크게 겁을 먹은 사신은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급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갈나고에게서 우로가 한 말을 전해 들은 왜왕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왕명을 받은 왜장 우도주군(于道朱君)은 갈나고를 길잡이로 삼아 정병 1만을 이끌고 신라를 급습했다. 우유촌(于柚村)으로 순행을 나가 있던 침해왕은 왜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급히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왜군은 감포로 상륙하여 사동천에 이르러 있었다. 사동천에서 금성까지는 채 80리도 안 되는 거리였다.
우로는 침통한 표정으로 왕 앞에 석고대죄했다.
“이번 일은 모두가 소신의 잘못입니다. 폐하께서 사신의 방자함을 참고 넘긴 것은 나라의 안녕을 생각하셨기 때문인데 신하 된 자로서 폐하의 뜻을 저버리고 경거망동한 탓에 난을 불러왔습니다. 이번 일은 소신이 목숨을 걸고 해결할 테니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우로는 국왕에게 고두숙배(叩頭肅拜)한 후에 홀로 사동천에 자리한 왜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다. 우로가 노을을 등지고 왜군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이 신비로워 왜의 군사들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는 유유자적 걸어서 우도주군의 앞에 이르렀다.
“이번 일은 사사로이 사신을 희롱한 나의 잘못이오. 나 하나만 처벌하면 될 일이니 군사를 물리도록 하시오.”
우도주군은 우로의 의기에 탄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장은 우로를 풀어 주려 했다.
그러자 갈나고가 쌍심지를 켜면서 반대했다.
“이는 왕명을 어기는 일이오. 장군이 총대장이라도 감히 폐하를 능멸한 자를 곱게 풀어 줄 수는 없소. 이자를 엄히 벌해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후대에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오.”
왕명을 들고 나오니 우도주군으로서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시오.”
앙심을 품고 있던 갈나고는 화형(火刑)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군사들은 우도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장군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군사들은 마지못해 장작을 가져다 서불한의 주변에 둘러쌓았다.
우로는 참선하듯 눈을 감았다. 갈나고는 아무런 동요가 없는 얼굴을 보고 오기가 생겼는지 군사들에게 어서 불을 놓으라고 재촉했다. 우로의 의연한 태도를 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 군사들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약이 바짝 오른 갈나고는 한 군사의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을 빼앗아 손수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우로의 몸을 뒤덮었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이 군사들의 한탄을 자아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다음 날 우도주군은 우로의 유해를 정성껏 수습해 금성으로 보낸 후 군사를 물려 왜로 돌아갔다. 이 당시 우로가 남긴 혈육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들 하나뿐이었다.
서력 262년 첨해왕이 자손 없이 세상을 뜨자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味鄒)가 신라의 제13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이때부터 박(朴)이나 석(昔)이 아닌 김(金)씨도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됐다.
미추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왜왕은 갈나고를 사신으로 보내 축하의 뜻을 전했다.
남편의 원수가 금성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우로의 아내는 왕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갈나고를 제 손으로 죽여서 지아비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미추왕도 어릴 때부터 우로를 존경했고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왜와 전쟁하는 한이 있어도 그대의 원한을 풀어 주겠소.”
우로의 처는 시녀를 객관으로 보내 사신을 시중들도록 했다. 그리고 객관 밖에 장사들을 매복시켰다.
융숭한 대접에 기분이 좋아진 갈나고는 시녀가 따라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는 완전히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시녀가 이를 알리자 장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객관 근처의 으슥한 시냇가로 사신을 끌고 갔다.
기다리고 있던 우로의 아내는 미리 쌓아둔 장작더미에 갈나고를 올려놓게 했다. 이때까지도 사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횃불을 들어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는가 싶더니 커다란 구렁이처럼 갈나고를 휘감아 한입에 집어삼켰다.
이를 지켜보던 우로의 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여보, 이제 편히 잠드세요.”
사신이 죽임을 당하자 화가 난 왜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미추왕은 정예병을 보내서 침략한 왜군을 대파했다. 이후로 왜국은 한동안 신라에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력 284년 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조분왕의 장자인 유례(儒禮)가 왕위를 이었다.
유례왕은 등극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서쪽 국경이 안정을 되찾자 이번에는 잠잠하던 왜국이 종종 침략해 왔다. 왕은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방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서력 298년에는 유례왕의 뒤를 이어 조분왕의 조카인 기림(基臨)이 왕좌에 올랐다.
기림왕은 왕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대신들은 우로의 아들 흘해가 아버지를 닮아 덕망이 높고 백성을 사랑하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가 바로 신라 제16대 임금인 흘해왕(訖解王)이다.
흘해왕은 한결같이 백성의 어려움을 살폈다. 가뭄이나 홍수·병충해로 백성이 곤궁에 처하면 관곡을 풀어 구휼했고 죄수의 죄질을 따져 경미한 자들은 모두 석방했다. 역사(役事)를 일으킬 때도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국왕이 이처럼 선정을 베푸니 백성은 근심이 사라지고 나라는 날로 번창했다.
서력 312년 신라를 적대시하던 왜왕이 왕실 간의 혼인을 청해 왔다. 신라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인 흘해왕은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왜왕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신라와 왜의 우호 관계가 복원되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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