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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조선에서 러시아가 활개를 치게 되었고 나는 본국에서 버림받을 것이오.”
고무라는 넓은 이마를 찡그렸다.
“공사님, 제가 누굽니까? 이 안경수는 두루두루 통하는 인재입니다. 새 내각이 저를 찾을 것이니 마음 놓으세요.”
안경수는 황망한 고무라를 안심시키고 돌아왔다. 예상대로 박정양은 안경수를 온건한 인물로 알고 있었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나라가 혼란해지는 것을 조정해 줄 능력이 있다고 보아 새 내각에 끼워 주었다.
“지금도 고무라 공사는 안 대감을 신임 하는군요! 박정양 대감도 안 대감의 능력을 알아주고 말입니다.”
김종한이 감탄했다.
“안 대감은 정말 귀한 분이에요. 살얼음 같이 위태로운 이 때 어떻게 하면 안 대감처럼 폐하의 측근 세력과 왜성대의 신임을 동시에 받을 수가 있는지 부럽소이다. 고무라 공사는 요즈음 잘 지내나요?”
“왜성대 분위기가 어찌 좋겠습니까? 기껏 왕후를 제거하고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태가 돌변하면서 국왕을 러시아에 빼앗겼으니 ‘닭 쫓던 개 지붕 올려다보는 격’이지요.”
안경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황망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고무라의 이지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고무라 공사는 이범진과 베베르가 폐하를 감쪽같이 빼돌린 일을 전혀 예상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담을 수 없잖습니까? 우리가 힘을 모아 폐하가 환궁하시도록 하여 왜성대의 얼굴도 세워주고 조선의 개혁도 추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종한이 부추겼다.
“얼마 전 고무라 공사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페하께서 환궁하시는 날을 최대한 당기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예상대로 일본은 폐하의 조속한 환궁을 고대하고 있더군요. 망명 당일, 고무라 공사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폐하를 알현하며 빨리 경복궁으로 돌아가시도록 주청 드렸다고 합니다. 제 마음도 같습니다. 그것만이 조선이 살 길입니다. 일본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손을 좀 썼습니다.”
안경수가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는 육전을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그래요? 그게 무엇입니까?”
김종한이 다그쳤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을 안경수에게 바싹 들이대었다.
“대감, 얼마 전에 전 주사 윤효정이 상소를 올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안경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환어를 주청 드리는 상소 말이군요. 안 그래도 반가웠습니다. 누군가 폐하께 올려야 하는 청원이지요. 그런데요?”
“저의 작품입니다. 윤 주사를 만날 기회가 있어 넌지시 이야기를 했어요. 진정한 충신이라면 용기를 내어 폐하께 꼭 주청해야 한다고요.”
“역시! 안 대감은 지혜로워요. 그 상소에 연루된 사람들이 200명이 넘고 그중 50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제게 의견을 물으셔서 그들의 충심을 이해하심이 온당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선 저의 충언을 들으시고 ‘가까운 시일 내에 대궐로 환어 하겠다’고 답하셨어요. 하지만 아직도 돌아갈 생각이 없으신 듯합니다.”
안경수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가득했다. 고종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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