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빛’ [174] 마곡사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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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좌가 되면 어떻겠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3 06:30:10

창수는 이 서방과 하루 종일 걸었다. 황혼이 되어서야 마곡사 남쪽 산 정상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그곳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 산에 단풍이 아름다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님이 어찌하여 승려가 되려 하십니까?”

창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가 내게 시집와서 한창 도타운 정을 나눌 무렵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오. 사내아이였는데 그 아이도 며칠 못 살고 제 어미를 따라갔지. 마음을 잡지 못하고 1년을 술로 지내다가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찾아 와 훈장질을 하게 된 거요.”

이 서방이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창수는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사람들은 내게 혼처를 주선했지만 죽은 아내 생각에 새장가들 생각은 없었다오.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공부하러 오는 사내아이들을 보니 죽은 아이 생각이 절절했다오. 그 아이가 지금 살았으면 이 아이들만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속세를 떠나고 싶으신 게로군요.”

“서방 잘못 만나 먼저 간 아내와 아비 잘못 만나 피어보지 못한 아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번 생의 업장을 풀어보려는 게지.”

이 서방의 말이 흐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창수는 마음이 쓸쓸해졌다. 자신의 혈육인 부모님은 어찌하고 계실지, 과연 고향에 돌아가 잘 지내고 계실지 걱정이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두 분의 신세가 안쓰러웠다. 장가들어 일가를 이룰 나이에 이런저런 일을 치르면서 급기야는 쫓기는 신세가 된 자신은 얼마나 불효한 아들인가!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해가 어느덧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곡사의 저녁 종소리가 석양을 가르며 울렸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 서방이 물었다.

“김 형은 어찌하시겠소? 나와 같이 세상사 다 잊고 불도에 입문하십시다.”

창수는 금방 답을 할 수 없었다. 태화산의 선경을 내려다 보니 부질없는 일 모두 잊고 이곳에 은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다.

“일단 절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시게나.”

이 서방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세찬 시냇물 위의 나무다리를 건너 마곡사 심검당에 들어갔다. 이 서방은 창수를 심검당에 두고 잠시 다른 방으로 갔다. 저녁을 먹은 후 창수는 백발의 노승과 마주했다. 그는 삭발한 지 40~50년 된 사람이었다.

“김 형께서 나의 상좌가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노승은 아주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모자란 사람입니다. 대사님께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당신이 내 상좌가 되어 준다면 고명한 대사께 불교의 심오한 학문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김 형은 앞으로 큰 재목이 될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결심하시지요.”

창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이 되니 이 서방이 삭발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직도 망설이고 있소? 김 형도 마음을 정하시오. 어제 만난 하은당은 재산이 많은 보경대사의 상좌라오. 공부하는 데 드는 학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내가 김 형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더이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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