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빛’ [176]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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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있는데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5 06:30:20

“원종대사가 지금은 고생을 하지만 노사와 은사가 모두 칠십 팔십 노인들이니 그분들이 돌아가고 나면 엄청난 재물이 다 원종대사 차지가 될 것이니 조금만 버티시오.”

절에 있는 중들은 이렇게 말하며 창수를 짐짓 부러워하였다. 창수가 ‘추수책’을 살펴 보니 경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가 매년 백미만 200여 석이나 되고 돈이나 다른 상품도 수십만 냥이 되었다. 하지만 창수는 속세와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불도에 평생을 바쳐 불자가 될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경을 암송하는 중에도 지나간 일들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인천옥을 탈출하였으나 부모님은 어찌하고 계실까? 과연 무사하실까? 나를 도우려 재산을 다 날리고 자신의 신세까지 망친 김주경 어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향 해주의 고능선 선생님은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실는지? 안 진사가 내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그분은 어떻게 되었는지? 좁은 마음에 안 진사의 천주학 입교를 좋지 않게 보고 고향을 떠났는데 사과할 기회나 있을까?’

불상 앞에 절을 올리는 동안에도 부처님 상 위로 어머니, 아버지, 고 선생, 김주경, 안 진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창수는 어느 날 아침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있는데 산속에 계속 숨어 있으면서 보경대사의 재산이나 기대하고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창수는 용기를 내어 보경대사를 찾았다.

“대사님, 소승이 불도에 입문한 바에야 불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금강산에 가서 경전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너의 마음이 그렇다면 허락하마.”

보경대사는 순순히 허락해 주었다. 그는 하은당에게 창수의 일을 의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은 있었으나 보경대사의 뜻대로 되었다. 그는 창수에게 가사와 바리때, 백미 열 말을 주었다. 창수는 백미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서울로 향했다.

며칠 안 되어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중은 사대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서문 밖에 있는 절에서 하루 묵으면서 혜정이란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창수는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침 혜정 스님이 평양 구경을 떠난다고 하였다.

“저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니 평양은 거기서 아주 가깝지요. 제가 동행할 수 있습니다.”

“원종 스님, 고맙습니다. 저는 경상도 풍기에서 왔습니다. 평양에 가고는 싶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은덕이십니다.”

혜정 스님은 합장을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임진강을 건너 개성과 해주부터 구경하고 평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해주 외곽의 수양산 신광사에 도착하자 창수는 혜정 스님에게 자신의 내밀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원종 스님이 바로 그 유명한 김창수 님입니까? 우리 조선에 원종 스님처럼 용감하고 정의로운 영웅이 계신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혜정 스님은 창수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아주 반가워했다.

“스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텃골에 있는 저의 본가에 가서 부모님을 몰래 만나 주십시오, 아들 창수는 잘 지낸다고 전해 주시고, 제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비밀로 하십시오.”

“소승이 원종 스님을 돕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염려 마시고 기다리십시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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