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179] 즉조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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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농조차 남지 않아도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20 06:30:20

“폐하, 경하 드리나이다!”

중년의 신하가 광무황제께 예를 올렸다. 황제는 경운궁 즉조당 평상에 앉아 흐뭇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평상 뒤로는 병풍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아담한 책상이 놓여있다. 백수백복도자수병풍에는 한자 ‘복(福)’과 ‘수(壽)’가 다양한 문양과 우아한 색채로 반복해 수놓아져 왕실의 장수와 다복을 기원한다. 평상 바로 앞 철제은입사화로의 뚜껑 부분에는 복을 상징하는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펴고 은으로 새겨져 있다. 화로의 몸통 부분에는 십장생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철제은입사촛대에도 기쁨을 뜻하는 한자 ‘쌍 희(囍)’를 은으로 새겨 두었다. 중년의 신하는 황제의 집무실 안 이 모든 물건들이 요즈음 황실의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스쳤다.

“경선궁(엄비)도 강건하다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황제가 답했다.

“하늘이 대한제국의 앞길에 빛을 보내심입니다. 얼마 만에 맞는 황실의 경사이옵니까?”

“제국을 선포함에 때맞추어 내게 와준 아이로다!”

광무황제의 얼굴에는 기쁨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만백성이 황실과 제국의 경사를 반기고 있사옵니다.”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관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친다. 사관은 방의 바깥 쪽에 짙은 밤색의 경상(작은 책상)과 함께 연상(벼루와 붓과 먹 보관함)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광무황제와 마주한 신하는 대한제국 탁지국 전환국장으로 임명된 이용익이다. 그는 이 태조의 백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17대손으로 1854년에 함경도에서 태어났으니 광무황제보다 두 살 적었다. 아버지 이병효는 종5품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이용익은 14세까지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고 보부상을 하다가 단천에서 금광으로 큰돈을 벌었다. 서울에 올라와 민영익의 문객이 되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에 피신해 있던 왕후와 민영익 사이에 연락을 담당하여 왕의 신임과 벼슬을 얻었다. 광산사업에 유능한 그는 단천부사, 북청부사, 영흥부사를 거쳐 1887년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함경도 일대의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면서 해당 지역의 광무감리(광산을 감독하면서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는 직책)를 겸임해 왔다.

“이 공! 대한제국이 강건하게 서는 데는 그대의 지혜와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오. 그대는 짐을 도와 제국과 황실을 보필해 주겠는가?”

철제은입사촛대 위에서 불타고 있는 촛불이 황제의 결연한 표정을 비추었다.

“폐하, 폐하가 원하신다면 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사옵니다. 신의 작은 몸이 대한제국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나이다.”

이용익이 머리를 숙여 거듭 맹세했다. 그는 자신이 제국의 심지가 될 수 있다면 이 초가 되어 불타 촛농조차 남지 않는다 하여도 아깝지 않았다.

“황후가 가시던 바로 그 새벽에 나는 황후와 약조를 하였소. 대한제국을 세워 조선을 빛나는 나라로 만들자고 말이오. 이제 황후는 가시고 없지만 내게는 그대가 있지.”

광무황제의 음성이 다정해졌다.

“짐은 다시금 그대에게 대한제국의 각종 광산의 일을 모두 감독하는 일을 부탁하오!”

황제는 이용익만큼 충성된 자가 없고 이용익만큼 유능한 신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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