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180] 축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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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리 길을 12시간에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21 06:30:20

이용익은 갸름한 얼굴에 선이 가는 이목구비를 지녔다. 머리숱은 많지 않고 덩치가 유난히 큰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씩 내비치는 눈의 총기가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이용익의 게슴츠레한 눈은 힘없어 보이지만 그건 평소의 그의 인상이었다. 번뜩이는 총기가 서리면 안광의 힘이 거칠었고 오라가 뿜어졌다. 보부상 때 다져진 다리의 힘은 그가 축지법을 쓴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광무 황제는 문득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황후가 살아계실 때 우리 둘이 경을 시험해 봤는데 경은 그것을 기억하는가?”

“폐하, 우둔한 신을 시험하심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험한 것은 바로 경의 두 다리였다네.”

광무 황제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민영익이 황후와 짐에게 그대가 축지법을 쓴다고 고했지. 짐은 그 말을 일축했으나 곤전께서 꾀를 내어 그대의 다리를 시험해 보자고 했네.”

“폐하, 신도 그 일이 생각나옵니다. 부채 말씀 아니옵니까?”

“기억하는군. 황후께서는 전주 감사에게 부채 1000개를 만들어 올리라는 편지를 경을 시켜 전달하게 하자고 했는데, 전주 감사가 답서를 올릴 때 반드시 발송 시각을 명기하도록 했지. 경은 아침 9시에 편지를 들고 전주로 떠났고 다음날 밤 9시에 돌아왔지. 곤전과 함께 발송 시각을 확인하니 전주 감사가 아침 9시라고 적어 두었던 게야.”

이용익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왕명의 출납을 위해 먹지도 않고 서둘러 다녔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소신의 기억에 아침 9시에 출발하여 당일 저녁 9시에 도착하였나이다.”

“그래 그랬지. 경은 500리 길을 겨우 12시간 걸려 돌아오지 않았던가! 임오군란 때문에 황후께서 장호원에 계실 때 그대는 짐의 안부편지를 황후께 가져가고 답신을 받아 그날로 짐에게 전해주었지.”

“폐하의 말씀에 신은 몸 둘 곳이 없사옵니다.”

“을미년에 황후께서 변고를 당했을 때 짐은 그대를 생각했다. 혹시 그대가 나의 곤전을 업고 장호원보다 훨씬 먼 곳으로 피신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야.”

광무 황제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폐하, 신의 불충을 어찌해야 합니까!”

이용익이 엎드려 흐느꼈다. 임오군란 때 이용익은 왕후를 들쳐 업고 잰 발걸음으로 피신시켰다.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충성된 행동이었다. 그렇게 왕후는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을미왜변 때 그는 함흥 관찰사로 외지에 나가 있었다. 황제가 그를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곤전은 두 번이나 땅에 묻혔구나.”

황제는 다시 황후의 생각에 잠겼다. 임오군란 때 복귀한 대원군은 왕후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살아있는 왕후의 국장을 과감하게 치루었던 것이다.

“짐이 그대와 마주 앉아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있구나. 오늘 경을 부른 것은 앞으로 경이 힘써 줄 일을 당부하고자 함이었는데…”

“하명 하옵소서, 폐하!”

“그대는 나라의 근간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제국의 근간은 폐하와 황실이시옵니다. 폐하의 강령하심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옵니다.”

“그대는 과연 나의 충신이로고!”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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