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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와 청계천 사이 1km 남짓한 땅을 두고 또 한 번 격렬한 논쟁이 일고 있다. 바로 ‘세운 4구역’이다. 반세기 넘게 전자·기술인의 요람이자 동시에 슬럼의 상징으로 남았던 세운상가 일대가 다시금 도시의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무대로 떠올랐다.
서울 종묘 인근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을 두고 학계와 문화유산 단체들도 강하게 반발했다. 12일 한국고고학회·한국건축역사학회 등 27개 학회와 6개 협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종묘 인근 고층 개발은 세계유산의 존엄과 경관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서울시의 층고 완화 방침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은 “종묘는 건물뿐 아니라 한양의 역사와 삶이 어우러진 문화적 공간”이라며 “도시개발이 아닌 문화유산 보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묘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달 30일 서울시가 고시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이다. 종로변 최고 높이를 기존 55m에서 98.7m로, 청계천변은 71.9m에서 무려 141.9m로 상향했다. 이로써 종묘 정문 맞은편 불과 170m 거리의 부지에 4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들어설 길이 열렸다.
11일 CBS라디오에 출연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 4구역은 세계유산지구 밖에 있어 세계유산영향평가 대상이 아니다”라며 “종묘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종묘 정문에서 첫 건물이 시작되는 거리가 170m, 정전까지는 500m 떨어져 있다”며 “그 거리에 100층 건물을 세워도 ‘숨이 막힌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 없는 감성적 표현”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장기간 판자촌으로 방치된 세운상가의 경제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높이 제한 완화가 불가피하다”며 “세금으로 1조5000억 원의 이주비를 쓸 바엔 민간 개발로 전가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운상가를 허물고 남산까지 녹지를 조성하면 결국 최대 수혜자는 종묘가 될 것”이라며 “흉물로 방치된 구역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세운4구역 주민대표단과 소유주들은 11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앞 기자회견에서 “세운4구역은 종묘 정전에서 600m 이상 떨어져 있으며 완충구역 기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국가유산청 등이 사업을 막는다면 손해배상과 직권남용 등 민형사상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맞서 김민석 국무총리는 10일 종묘 현장을 찾아 “서울시 주장대로 종묘 바로 앞에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면 종묘의 눈을 가리고 숨을 막히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될 가능성도 있다”며 “유네스코는 주변 경관까지 포함해 보전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는 1995년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의 고층 건축 인허가를 금지할 것”을 명시했다. 최근에도 세운 4구역 개발에 앞서 세계유산영향평가(HEIA) 실시를 권고했다. 국가유산청은 “종묘 정전에서 숲 너머로 고층 건물이 드러나면 등재 근거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운 3구역의 27층짜리 ‘힐스테이트 세운센트럴’이 종묘 정전에서 숲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종묘에 더 가까운 4구역의 145m 건물은 시야에 명확히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유네스코는 과거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2009)과 영국 리버풀 해양도시(2021)의 세계유산 자격을 ‘주변 개발로 인한 경관 훼손’ 사유로 취소한 바 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재개발을 “20년간 쇠락한 지역의 재생”으로 규정하며 “역사문화환경보존구역(100m) 밖이므로 고도 제한 대상이 아니고 기존 높이(71.9m)로는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부채납을 통해 녹지를 확충했다”며 고층 개발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비판 여론은 정반대다. 세운상가가 쇠락한 지난 20년 중 절반은 오세훈 시장 재임기에 해당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조건상 종묘 인근에는 경관을 훼손할 수 있는 고층 건축이 금지돼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지난 6일 판결에서 “서울시 조례가 없어도 난개발 억제가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전문가들은 “세운상가 일대는 종묘 자체만으로도 녹지가 충분하며 고층 개발이 아니라 합법적 범위 내 건폐율 조정만으로도 사업성 확보가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구도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이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발 대 반개발’ 구도를 형성하며 치적 쌓기에 나선 반면, 정부는 “종묘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문화유산 보호 대 난개발’ 구도로 맞서고 있다. 서울시가 대법원 판결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유네스코의 경고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점점 ‘문화유산 파괴 논란’ 쪽으로 기울고 있다.
결국 세운상가 논란의 본질은 단순한 재개발이 아니라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프레임 싸움으로 확장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서울시가 흉물 이미지를 강조하며 ‘세운상가 방치 vs 개발’ 구도로 전환을 시도하지만 이면에는 법 절차를 무시한 무리한 추진과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며 “이른바 ‘오세훈식 개발 정치’가 불법과 무능의 벽에 부딪힌 셈”이라고 비판했다.
11일 오후 기자가 찾은 종묘 앞에서 만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세운상가 개발을 “조선시대 사대부적 사고관을 벗어난 진취적 도시 재구성의 과제”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민석 총리는 과거 운동권, 주사파 성향의 사고를 가진 인물로 주체사상은 사회주의보다 조선시대 성리학과 가부장적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그의 종묘 보존론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복고적 정치철학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오세훈 시장은 종묘로 인해 종로가 수십 년간 발전하지 못했다는 현실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운상가 인근 상가 상인들 또한 “개발은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다만 정부 정책과 보상 계획 모두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한 상인은 “여긴 너무 낙후돼서 이제는 개발해야 한다. 사람도 잘 안 오고 그대로 두면 더 썩는다”며 “보상해주면 나가야지, 두둑하게 줄 거란 건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는 그냥 쫓겨나듯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나이도 있고 젊은 사람들이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상인은 “서울시가 여길 녹지로 만들고 상가를 이주시킨다고 말은 하지만 그건 다 정치인들의 인기용 말뿐”이라며 “박원순 때도, 오세훈도 다 똑같았다. 말만 많고 실제 계획은 없었다”고 냉소했다.
펜스가 둘러쳐진 세운상가 개발 부지에서 쫓겨난 한 상인은 “우리는 이미 한 번 쫓겨난 사람들이다. 깡패 같은 사람들이 와서 거의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며 “2500만 원 받아 직원 퇴직금 주면 끝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정부든 대통령이든 신뢰하지 않는다”며 “그래도 종로 한복판을 이대로 둘 순 없다. 문화재청이 반대하든 유네스코가 뭐라 하든 개발은 해야 한다. 문제는 늘 서민들 피해뿐”이라고 밝혔다.
세운상가, 도시개발사의 축소판
1968년 준공된 세운상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시장이 개관 테이프를 끊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상가’였다. 한 때 '서울의 심장'이라 불리며 전자·음반·기술산업의 메카로 번성했지만 1980년대 이후 용산전자상가의 부상과 강남 개발로 급속히 쇠락했다. 1990년대에는 불법 복제와 음란물 유통의 온상으로 전락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도시 슬럼의 대명사가 됐다.
2006년 서울시는 세운지구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며 철거를 추진했으나 2009년 문화재심의에서 종묘 경관 훼손 우려로 제동이 걸렸다. 2012년 박원순 시장은 사업을 백지화하고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방향을 전환해 공중보행로와 청년 창업공간, 예술 스튜디오를 조성했으나 상권 회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행로 개통 후 유동인구는 기대치의 20% 수준에 그쳤고 상가 매출은 오히려 줄었다.
오세훈 시장은 2022년 재취임 후 ‘녹지생태도심 조성 전략’을 발표하며 다시 철거와 공원화를 꺼내 들었다. 세운상가를 허물고 종묘에서 남산까지 녹지축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용적률은 유지하되 건폐율을 줄여 녹지를 확보하겠다”며 “북악산–남산–한강으로 이어지는 도심 녹지벨트를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찬성 측은 세운상가 일대가 D등급 위험시설로 방치돼 있고 서울 도심의 녹지율이 3.7%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경의선 숲길처럼 선형 공원이 만들어질 경우 도심의 생태·경관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기자가 찾은 해당 지역 노후 주상복합 건물에서는 천장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져 있었으며 한순간에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과거에도 세운상가 인근 노후 건물의 콘크리트 외벽 일부가 떨어져 약 80kg에 달하는 파편이 지나가던 행인의 발등을 덮쳐 큰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58년 된 콘크리트 구조물과 판자 건물들이 뒤엉킨 세운 일대는 이제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 건축 전문가는 “세운상가는 도시 구조적으로 잘못된 설계의 대표적 사례”라며 “서울의 도로는 대부분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형성돼 있는데 세운상가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도시의 흐름을 가로막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수근이라는 뛰어난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2층 보행 덱구조가 1층 상권과 경쟁을 만들어 결국 둘 다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며 “이제는 세운상가를 비워 경의선숲길처럼 선형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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