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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을 맴돌던 30대 초반 여성 조성은 씨의 제보로 촉발된 윤석열 전 검찰총장 관련 ‘고발사주 의혹’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등장으로 그 모양새가 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야당 쪽에선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또는 ‘박지원의 제보사주 의혹’이라고 주장한다. 조 씨의 발언이나 박 원장과 조 씨의 수시 회동 등으로 미뤄본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말이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발의해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개정 국정원법이 사실상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또는 국내정치 개입의 길을 터준 것이란 점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장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반면 국정원이 정작 본연의 임무인 청주 간첩단 사건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어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이 직무를 유기하면서 엉뚱한 권력화만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쇄신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감무소식 청주 간첩단 사건 추가수사… 국가안보실장 ‘결재 연기’ 의혹
14일 국회에서 있은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첫 질문자로 나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석기 의원은 김부겸 국무총리를 상대로 “문재인 대통령이 간첩의 도움을 받아 당선된 것 아니냐”고 따졌다. 청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회활동가가 지난 대선 때 문재인캠프 특보단에서 활동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김 의원의 질문이 끝나자 본회의장은 술렁였다. 여당 의원들은 고성을 지르면서 김 의원에게 강력 항의했다. 김 총리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선거 때는 누군지도 모르는 많은 분이 돕게 돼 있다. 대선 캠프에 그런 분(사회활동가)이 몇 만 명 되지 않았나. 국가원수에 관한 부분은 표현에 신중을 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정원의 미진한 간첩단 사건 수사를 질타하면서 조 씨와 박 국정원장의 회동에서 촉발된 대선(정치) 개입 의혹을 꺼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망친 것도 모자라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국정원‧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검찰 등을 총동원해 야당 유력 대선주자를 강제로 끌어내리려는 공작정치를 하고 있다”며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가 아닌 정치공작에 휘말렸다”고 일갈했다.
실제로 청주 간첩단 사건의 추가 수사는 감감무소식인 실정이다. 청주 간첩단 사건은 충북지역 활동가들이 북한 지령을 받고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운동을 하거나 반(反)보수 정치활동을 하다 적발된 사건이다. 수년간 북한 공작원과 만나 지령·보고 등을 주고받고, 공작금까지 받은 정황이 드러났다. 용의자들의 구속 기간은 2일 연장됐지만 정식 기소가 이뤄지지 않아 아직 재판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국정원장을 지낸 서훈 국가안보실장의 ‘결재 연기’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서 실장은 지난달 23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다만 문 대통령에게 보고했냐는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질문에는 “내사 중인 사건이라 보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언론에 크게 보도까지 된 엄청난 사건을 대통령한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게 상식적이지는 않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청와대 측은 간첩단 사건의 용의자 일부가 문재인캠프 소속이었던 지적에 대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태 의원은 “결국 (청와대가 국정원에 간첩단 사건을) 조사할 가치가 없다는 가이드라인을 준 것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게 도대체 무슨 답변인가.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용의자가) 어떤 일을 했고 (문재인캠프의) 누구와 일했는지 소상히 밝히는 게 유권자에 대한 예의다”고 일갈했다.
국정원 개혁 명분 해외요원 국내정치 개입 길 터… 野 “초유의 대선개입 사건”
박 원장의 등장으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이 나날이 커지면서 지난해 말 국정원 개혁 차원에서 여당의 발의로 행해진 국정원법 개정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되, 3년간 유예기간을 두도록 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 측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 국정원법의 경우 국정원 국내 정보담당관(IO)의 주요 기관 출입금지 조항이 전면 삭제됐다.
이전에는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IO 출입을 엄금했다. 박근혜정부 때다. 2013년 여야 합의로 만든 국정원법 15조 2항은 “국정원 직원은 다른 국가기관과 정당‧언론사 등 민간을 대상으로 법률‧내부규정에 위반한 파견‧상시출입 등 방법을 통한 정보활동을 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다. 해당 조항은 2014년부터 시행됐고 2017년에는 모든 기관에 대한 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작년 개정안 처리로 이 같은 안전장치가 사라졌다. 여당이 사실상 국정원의 정치 개입 길을 터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 의원은 “국정원이 국내 정보 개입과 사찰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홍보했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여당은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표결로 강제 종결시키면서까지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에 대해 여당은 국정원에 국내 정보조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항을 삭제해도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개정안을 발의했던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내 정보조직을 만들 수 없으니 당연히 (기관에) 출입하는 사람도 없고 때문에 조항이 삭제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측도 유사한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야당은 국내 정보조직이 없어도 해외 요원을 국내 정보수집에 불법 투입한다 해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사라진 셈이기에 사실상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노린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법 개정으로 국정원의 방첩 범위를 ‘산업‧경제 정보 유출과 해외 연계 경제질서 교란 및 방위산업 침해’로 넓힌 것은 사찰용 아니냐고 따졌다. 조 의원은 “우리나라 경제 문제 중 해외와 연계되지 않은 게 어디 있나”라며 관련 조항으로 국정원 해외 요원들이 국내 정보수집에 투입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당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도 “이번 개정안으로 국정원은 민간인 대상으로 경제사찰을 가능하게 됐다”고 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야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조 씨와 박 원장 간의 회동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인 김기현‧신원식‧조태용‧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15일 입장문을 내고 “민주화 이후 국정원 역사상 대놓고 정치에 개입하는 초유의 사건이다”고 질타했다. 하 의원은 “문 대통령은 조속히 박 원장 거취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해임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처럼 직무유기와 정치개입, 권력화의 논란에 선 국정원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정원이 조 씨의 (서울 중구 소공동 L호텔 국정원 안전가옥 등에 대한) 출입 사실조차 공개를 거부했다. 조 씨가 국정원 VVIP거나 박 원장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아니냐”며 “추석 직후에 뭔가를 또 작당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돈다. 국민의힘은 낱낱이 실상을 파헤칠 것이다”고 경고했다.
지금의 국정원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원훈으로 삼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이런 정보기관이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논란에 휘말린 것은 수치다. 더구나 국정원장이 공무와 무관한 일로 사인을 만나고, 자신의 동선을 노출시키면서, 대선 개입같은 정치적 논란을 자초하는 것은 선진국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1998~1999년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국정원 설립 후) 지난 60년 역사에 어두운 면이 있다면 국정원 자체보다는 국정원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 정치권에 책임 상당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해봐야 한다”며 “정권마다 원장을 교체해온 관례를 막기 위한 원장 임기제 도입 등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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