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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밝힌 고구리사초략
임나일본부설 뒷받침하는 신묘년 기사는 허구
광개토왕 비문 위조하며 거짓주장 펼친 일제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1-12-17 17:03:08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안전에 큰 위협이 되는 역사이론이 바로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다.
 
동북공정은 한나라가 식민지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다는 주장이며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했다는 이론이다. 물론 둘 다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주변에 사는 힘센 깡패들이 무자비하게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우리가 설 땅이 없지 않은가.
 
정한론(征韓論)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 왜 정권이 4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에 있던 임나지역을 식민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그 임나를 가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쓰에마스 야즈가즈(末松保和)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이론적 논거가 빈약해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지만 최근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부활과 함께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사료적 근거로는 《일본서기》의 중애(仲哀)왕 9년(320)에 신공(神功)왕후에게 신라가 항복하니 고구려·백제가 서쪽 제후임을 자청하고 조공을 약속했으며 그로부터 49년 뒤(369)에 신라를 격파한 후 가야 7국을 평정해 임나(任那)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내세우고 있다.
 
게다가 유물적 증거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 비문에 새겨져 있는 신묘년 기사라고 하면서 일본학자들은 안 보이는 결자 2자를 ‘가야’로 보고 왜를 주어로 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가져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가야·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아울러 소위 위 신묘년 기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비문의 영락 10년(400년)과 14년(404년)에 새겨져 있는 왜 관련 기사의 내용을 못 알아보도록 글자를 깨뜨려버렸다. 과연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한 광개토왕 비문의 위 신묘년 기사의 내용은 옳은 해석일까.
 
▲ 비문의 변조된 글자에서 흘러내리는 횃물. [사진=필자 제공]
 
먼저 참고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왕이란 호칭은 잘못된 것이다. 비문에 새겨진 연호(年號)는 영락(永樂)이고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평안은 휘호(徽號)이고 광개토(廣開土)는 ‘땅을 넓게 개척했다’는 치적을 말하는 것이므로 호칭은 광개토왕이 아니라 년호를 따 영락제(永樂帝) 또는 그냥 호태왕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첫째 신묘년 기사는 원래 없었다. 위 문구는 호태왕의 5년(을미) 기사의 말미에 6년(병신) 기사 앞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위 문구는 5년(을미년) 기사의 일부이지 신묘년 기사로 따로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묘년은 호태왕이 보위에 오른 391년이다. 『삼국사기』의 호태왕 재위연도 392년(임진)~413년(기축)은 오며 비문에 새겨진 재위년도는 391년(신묘)~414년(갑인)이다.
 
둘째 위 문구는 유래(由來)~ 이래(以來)~ 용법에 의거 해석해야 한다. 來渡海(래도해)의 주어는 왜이며 破百殘□□□羅(파백잔□□□라)의 생략된 주어는 고구리가 돼야 마땅하다. 고구리 태왕의 비석이므로 주어가 고구리일 경우 생략될 수 있다.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다.
 
“백잔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가져왔으며 왜는 신묘년(호태왕 즉위) 이래 바다를 건너 (조공을) 가져왔다. (고구리가) 백잔□□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하면 이상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구리가 예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던 백잔□□신라를 왜 굳이 깨고 신민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6년의 백잔 공격 기사는 이해가 되지만 10년에 신라로 쳐들어온 왜를 섬멸해 신라를 구원해줬는데 뜬금없이 그런 신라를 신민으로 삼다니 말이다.
 
깨진 두 글자는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고 했던 다른 주체지 고구리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또 만약에 □□가 왜였다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혈안이 됐던 일제가 그걸 훼손할 리가 있었겠는가.
 
혹시 우리측 사서에 신라와 관련된 문구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3년(394)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해오자 왕이 정예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싸워 격퇴시켰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7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했다”와 “4년(395) 가을 8월, 임금이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싸워 대패시키고 8000여급의 목을 노획했다”는 백제와의 기록만이 있어 □□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구리사초략』에 깨어진 □□가 무슨 글자였는지를 알려주는 문구가 있으니 “영락 5년 을미 8월에 백제의 진무가 또 빈틈을 노리고 쳐들어와 상이 기병 7000명을 휘몰아 패수에서 8000여수급을 노획했다. 말갈이 신라의 실직을 침략했다.(末曷侵羅悉直)”는 기록이다. 문제의 □□는 바로 말침(末侵) 또는 갈침(曷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칭 신묘년 기사로 잘못 알려진 영락 5년 기사의 마지막 문구는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호태왕 즉위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조공을) 가져왔다. (8월에 고구리가) 백잔을 깨고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로 해석된다.
 
일본 궁내청에서 잠자고 있었던 『고구리사초략』에 의해 호태왕 5년 비문의 깨진 두 글자가 복원됨으로써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호태왕 비문까지 위조해가며 정립하려고 했던 임나일본부설은 여지없이 완전 허구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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