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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자(治者)들은 국가경영에 있어서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인간이 지켜야 할 미풍양속도 모두 ‘밥’에서 비롯된다는 게 현명한 이들의 국정철학이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가였던 관이오는 이러한 사상을 몸소 실천에 옮긴 선구자적 인물이다. 관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당초 제환공과 철천지원수 사이였다. 골육상잔을 거쳐 왕위에 오른 환공은 라이벌 측에 가담했던 관이오를 숙청하려 했다. 하지만 측근이었던 포숙은 “제나라만 다스리려면 저 같은 사람들로도 충분하지만 패자(霸者)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려면 관중 없이는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한때 관이오에 의해 죽을 고비까지 넘겼던 환공은 사감을 접고 그를 중용했다.
일껏 목숨을 건졌지만 관이오는 치국의 도를 논하는 대신 철저히 침묵했다. 환공이 까닭을 묻자 그는 “낮은 지위로 높은 지위를 다스릴 수 없어 자중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가장 높은 상경(上卿) 벼슬이 내려졌지만 관이오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환공이 재차 묻자 그는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다스릴 수 없어 그렇다”고 답했다.
관이오의 자택은 금은보화로 가득 찼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렸다. 환공이 또 묻자 관이오는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가져도 공족(公族)은 다스릴 수 없어 그렇다”고 했다. 급기야 환공은 그에게 중부(仲父)라는 호칭을 내렸다. 중부는 한마디로 ‘숙부님’이라는 뜻이다. 임금마저도 관이오를 어른이라고 존칭하자 왕족까지도 그를 만나면 공손히 고개 숙였다.
이렇듯 재상으로서 집권 환경을 완벽히 구축한 관이오는 비로소 개혁에 나섰다. 변화의 핵심은 단연 경제였다. 관이오는 부국강병의 바탕에는 가득 찬 곳간이 있다고 보고 철저히 국가경제력 강화를 추구했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管子) 목민(牧民)편을 보면 관이오가 얼마나 경제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관이오는 “(국가를) 지킴은 창고에 달려 있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멀리 있는 자가 오고 땅을 개척하면 백성들은 그곳에 머문다. 창고가 가득차면 (백성은)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게 넉넉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의식이 족하면 예를 안다’나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다와 인접한 제나라의 특성도 십분 활용했다. 관이오는 제염업(소금 생산)‧어업‧무역이 가져올 엄청난 이윤을 꿰뚫어보고 마치 박정희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듯 상공업을 중시했다. 그 결과 제나라는 부강해져 환공은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첫 패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패자는 통치권이 약해진 주나라 천자를 대리해 제후들을 호령하는 자리다. 논어(論語)에 따르면 관이오보다 후대 인물인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야만인처럼) 머리를 헤치고 왼편으로 옷을 매었을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경제의 중요성을 실천한 성군이 있다. 다름 아닌 조선 4대 국왕인 세종 이도다. 세종대왕이 재위한 31년7개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세종실록에는 ‘민유방본 식위민천(民惟邦本 食爲民天‧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세종은 말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밤낮으로 위민 정신에 전력을 다했다.
최재혁 경상남도농업기술원 환경농업과장에 의하면 세종 집권 시기 농지는 고려 말에 비해 2.4배, 한 결당 수확량은 4배 증가했다. 세종은 즉위 후 10여년 동안 가뭄이 지속돼 백성들이 굶주리자 열흘 밤을 지새울 정도로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당대 조선사회는 농상집요(農桑輯要)라는 원나라 농서를 참고했는데 양국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알고 한반도 조건에 맞는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집필토록 했다.
변효문 등 관리들은 농사 현장을 직접 찾아 농부들의 경험담을 집약해 이 책을 저술한 뒤 널리 보급했다. 세종은 이것도 모자라 경복궁 후원에 논 한 결을 만든 뒤 농사직설 내용대로 직접 농사를 지어 검증하기도 했다. 또 명나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역법으로는 농업 생산량을 늘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우리 절기에 맞는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역서를 만들었다.
초한쟁패로 널리 알려진 한고조 유방의 책사 역이기도 세종과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팽월의 유격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된 항우가 후퇴하자 유방은 한숨 돌리며 전선을 보다 서쪽으로 옮기려했다. 이에 역이기는 “하늘을 하늘로 알지 못하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없다. 왕업을 이룰만한 사람은 백성을 하늘로 섬겨야 하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간언했다. 또 진나라가 군량고로 활용한 오창(敖倉)을 점령한 뒤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을 풀어 백성을 먹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오창을 손에 넣은 뒤 자진입대한 대규모 신병과 함께 동진해 항우를 압박했다.
네거티브와 증오‧반목으로 점철됐던 20대 대선이 끝났다. 비록 ‘차악을 뽑는 선거’라는 자조적 목소리가 잇달았지만 현 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한 여러 공약들을 보면서 새 정부에 거는 국민적 기대도 적지 않다. 모쪼록 새 대통령은 첫째도 둘째도 국민 목소리에 삼가 귀 기울이고 세종대왕과 관이오의 정신을 따라 위민을 실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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