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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부담감이 컸다. 남쪽으로 떠난 아우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보답으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밤낮없이 정사를 돌보는 데만 힘을 쏟았다. 이날도 유리명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구했다.
“이 나라가 번영하려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겠소?”
“나라를 이롭게 하려면 백성의 생활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들의 살림이 나아져야 나라도 발전하게 됩니다. 근래 우리 고구려가 사해만방(四海萬方)에 무력을 과시하긴 했지만 그 탓에 백성의 생업에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목축과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의 삶이 윤택해지게 해야 합니다.”
나라의 살림을 맡은 협보는 민생을 우선시했다.
왕은 탁월한 견해라 여겼다.
“각 대가(大加)는 목축과 농업의 장려 계획을 수립해서 보고하시오.”
대가들의 설왕설래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재사가 나서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이제 폐하께서도 혼례를 올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국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혼례를 치른단 말이오.”
“민간의 예법이야 그렇지만 국왕은 다릅니다. 왕실을 이끌고 백성을 돌보아야 할 왕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서둘러 혼례를 올리셔야 합니다.”
다른 신하들도 이구동성으로 혼인을 권했다.
“경들의 의견을 따르겠소.”
유리명왕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리고 주몽의 유지에 따라 다물후 송양의 딸과 혼인했다. 왕후 송 씨는 어진 성품으로 궁인뿐 아니라 신하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다.
나라와 왕실이 편안한 가운데도 유리명왕에게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왕후의 건강이었다. 송 씨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는데 왕실의 크고 작은 일을 관장하면서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병이 생겼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가는 왕후를 보는 왕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신하와 백성 모두가 한마음으로 왕후가 소생하기를 기원했다.
만인의 바람이 헛되게도 가을 어느 날, 송 씨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세상을 등졌다.
왕은 왕후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국왕이 어전회의를 거르는 일이 계속되자 신하들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게 됐다.
“신이 폐하의 참담한 심정을 어찌 감히 헤아리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정사에서 손을 놓고 계시면 이 나라는 어찌합니까. 모든 신하와 백성이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리명왕은 침묵만 지킬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힘을 내셔야 합니다.”
유리명왕은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기운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래도 여전히 송 씨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마리가 유리명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폐하, 왕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새로운 왕후를 맞아들여 왕실의 분위기를 새롭게 하소서.”
“그 일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지 않소.”
왕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오이가 거들고 나선다.
“이것은 왕실의 안정뿐 아니라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일입니다.”
나라를 들먹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유리명왕의 처지였다. 신하들에게 매일 들볶이느니 혼인이든 뭐든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았다.
“경들의 마음대로 하시오.”
마리가 기뻐하며 고한다.
“골천 대가 화욱의 딸이 아름답고 현숙하다 합니다. 그녀를 왕후로 맞아들이심이 어떠합니까?”
골천은 대대로 농경을 업으로 삼아 풍요를 누리는 고장이었다. 조정에서도 농업 장려의 모범 사례로 주목하고 있었다. 화욱은 그곳에서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상당한 재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는 곧장 화욱에게 달려갔다.
왕후로 간택됐다는 소식을 들은 화욱의 딸 화희는 내심 뛸 듯이 기뻤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외동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다. 화욱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식솔들은 화희 앞에서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혼례식 날이 되었지만 유리명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붉은색 비단 위에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태후를 비롯한 백관들의 축복 속에서 성대한 혼례를 치르고 있자니 죽은 송 씨가 더욱 생각났다. 넓고 단아한 이마를 쳐다보면서 평생을 해로하자고 했던 맹세가 되새겨졌다.
혼례식이 끝나고, 어김없이 초야가 찾아왔다. 화희는 혼례를 치르는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왕에게 서운했다. 그렇다고 첫날밤부터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왕과 단둘이 남게 되자 거침없는 성격의 화희도 온몸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화희는 잔뜩 경직된 상태로 왕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술잔만 기울였다. 한참을 퍼마시더니 만취한 왕은 그대로 술상 위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화희는 혼례복을 입은 채 아침 햇살을 맞아야 했다. 그녀는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후에도 유리명왕은 왕후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태후의 강권에 못 이겨 화희의 처소를 찾기는 했으나 진심으로 정을 주지는 않았다. 왕후는 울분과 원망을 삭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유리명왕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옥지·구추 등의 근신을 데리고 기산으로 사냥을 떠났다. 한참 말을 달리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몸이 날랜 옥지가 선봉에 서서 짐승을 몰았다. 토끼와 사슴·멧돼지들이 활을 맞고 쓰러졌다. 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쏜 화살에 맞은 짐승들을 확인했다. 이때, 흰 노루 한 마리가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하얀 노루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물이었다.
흰 노루는 걸음을 멈추더니 왕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했다. 왕이 가까이 다가가자 노루는 앞장서서 달렸다. 왕도 그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유리명왕이 혼자 달려가는 것을 보고 구추가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홀로 가시면 위험합니다!”
구추는 말을 몰아 급히 왕을 쫓았다.
숲을 지나 한참을 달리던 흰 노루는 계곡으로 들어갔다. 유리명왕은 놓칠세라 말에 채찍질을 했다. 그래도 노루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뒤에서 구추가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왕이 계곡에 이르렀을 때 흰 노루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유리명왕이 허탈해 하고 있을 때, 구추가 뒤따라 당도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분명 흰 노루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는데…. 괴이한 일이로다.”
산중의 해가 짧다더니 어느새 어둠이 장막을 두르기 시작했다. 덩달아 구추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산속에서 날이 어두워지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민가라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져 다시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구추는 조심스럽게 물소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산에 익숙한 그는 계곡을 따라가면 민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을 앞장서 가던 구추가 돌아서며 외쳤다.
“불빛이 보입니다.”
유리명왕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불빛을 향해 갔다. 불빛을 따라가다 보니 제법 규모가 큰 기와집이 나타났다. 구추가 집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하인이 나오자 구추가 말한다.
“주인을 모시고 사냥을 나왔다가 날이 저물고 길조차 잃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소. 이 댁 주인어른께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지 여쭤 봐 주시오.”
문을 닫고 들어간 하인이 잠시 후에 나타났다.
“주인께서 모시라 하십니다.”
유리명왕은 구추를 앞세우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하인의 뒤를 따라가니, 깃을 꽂은 절풍을 쓰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사내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집의 주인인 치엽이라 합니다. 산길을 헤매느라 시장하실 텐데 우선 요기부터 하시지요.”
치엽은 유리명왕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술기운이 돌면서 흉허물이 없어지자 주인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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