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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주 대하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54] 범의 꼬리를 문 표범 ②
태조왕은 때가 무르익자 북을 울려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4-02 16:20:26
 
 
 
목도루는 군사를 몰아 도망치는 한군의 뒤를 쫓았다. 얼마 가지 않아 한나라 장수 공손포가 앞을 가로막았다. 공손포는 도끼를 들고 목을 겨냥해 들어왔다. 목도루는 날아오는 도끼를 가볍게 피한 후 몸을 틀어 창으로 적장의 어깨를 찔렀다.
 
공손포는 어깨에 창을 맞고 말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았다.
깜짝 놀란 그는 수하 군사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목도루는 한군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좌충우돌 베어 나갔다.
 
태조왕은 때가 무르익자 북을 울려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기병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뛰어나가자 대지가 요동쳤다. 한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기병의 무서운 기세에 놀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도망치는 한군을 끝까지 따라가 도륙했다.
 
이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요동 태수 채풍은 장수 용단과 함께 수십 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태조왕의 명을 받고 기다리던 양신을 만났다. 양신은 채풍을 보자마자 목을 취하려고 달려들었다.
 
채풍은 기절초풍하여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섰다. 절체절명의 순간, 용단이 뛰어나와 양신을 막았다. 채풍은 이 틈을 타서 줄행랑을 쳤다. 양신은 용단을 팽개치고, 채풍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용단이 양신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양신은 큰 칼을 휘두르며 용단을 몰아세웠다. 용단은 악착같이 양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양신은 헛손질하는 척하면서 적장에게 틈을 보여 주었다. 용단은 옳다구나 하면서 허점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에 양신은 몸을 틀어서 들어오는 칼날을 흘려 보내고 바로 상대의 허리를 벴다. 용단은 비명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채풍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파공음(破空音)이 들리더니 화살이 날아와 등에 꽂혔다. 채풍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힘없이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가 탔던 말은 등이 허전한지 발로 땅을 툭툭 차면서 구슬프게 울었다.
 
요동 태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성의 군사와 대치하고 있던 현도 태수 요광은 군사를 퇴각시켰다. 수성은 적을 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태조왕과 합류했다.
 
양쪽에서 모두 패하자 유주 자사는 덜컥 겁이 났다. 예맥성에서 물러날 때만 해도 운이 없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고구려군이 강맹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풍환은 고구려 진영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태조왕은 장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주 자사 풍환이 종전을 제의해 왔소. 어쩌면 좋겠소?”
 
요동을 회복할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적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지금 들이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수성은 강공을 주장했지만 고복장의 생각은 달랐다.
 
적들이 죽기 살기로 맞선다면 쉽게 제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피해도 늘어날 겁니다. 지금까지 차지한 땅을 인정받는 선에서 군사를 물리는 게 좋겠습니다.”
 
왕은 고복장의 말을 옳게 여겼다.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에게도 부담을 줄 수 있었다.
 
태조왕은 이번에 빼앗은 요동의 6개 현을 영토로 편입하는 선에서 화평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도성으로 돌아온 태조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를 치하하고 논공행상했다. 왕자 수성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군사에 관한 전권을 맡기고 목도루를 좌보,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정사를 돌보게 했다.
 
군권을 장악한 수성은 권력의 중심에 섰다. 자연히 그를 따르는 무리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그가 왕위를 이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변에서 아부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수성도 차츰 거만해졌다.
 
시일이 지날수록 수성은 더욱 오만방자해졌다. 왕자는 군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에도 자주 도성을 비우고 사냥을 나갔다. 그러고는 며칠씩 돌아오지 않는 날이 잦았다. 태조왕은 이를 보고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외유가 잦아지자 이를 보다 못한 아우 백고(伯固)가 수성을 찾아왔다.
 
화복(禍福)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불러들이는 겁니다. 형님은 지금 왕자이자 신료(臣僚)의 으뜸으로서 위엄과 공적이 드높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충의로써 부왕을 받들고 예의와 양심으로 사욕을 극복해야 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위로는 왕덕과 같이 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은 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환란이 닥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훗날의 근심은 생각지 않고 눈앞의 즐거움만을 좇다가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 겁니다.”
 
수성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은 누구나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만 그것을 얻는 자는 만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환락을 누릴 만한 자리에 있는데 즐기지 못한다면 이는 누리지 못한 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수성의 반박에 백고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백고는 길게 탄식했다.
 
앞으로 이 나라가 몹시 어지럽겠구나.”
 
몇 해가 지난 후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 때였다.
태조왕은 간밤에 꾼 꿈이 하도 기이하여 일관을 불렀다.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뜯는 꿈을 꿨다. 이것이 길몽이냐 흉몽이냐?”
 
일관이 공손히 대답했다.
 
범은 백수(百獸)의 우두머리요, 표범은 범의 동류로 작은 놈입니다. 꼬리를 물어뜯었다는 것은 해를 끼친다는 뜻입니다. 대왕의 친족 중에서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으리라는 계시입니다.”
 
심기가 불편해진 태조왕은 고복장을 불러 전후 사정을 얘기했다.
 
꿈이 이러하다니 걱정이구려.”
 
고복장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감히 왕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악한 일을 하면 길이 흉으로 변하고, 선한 일을 하면 재앙이 복으로 바뀐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백성에게 선덕을 베풀고 계시니 비록 변괴가 있다 할지라도 대수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수성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보아도 왕위를 이을 사람은 수성뿐이었다. 비록 서출이지만 장자인 데다 전쟁 영웅으로, 군사들은 물론 백성의 지지까지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직까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태조왕의 생각이 달랐다. 수성이 비록 뛰어난 무장이기는 해도 천성이 너무 잔인해서 백성을 다독이고 신하를 아우를 만한 덕성이 부족했다. 싸워서 영토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시점에서는 나라를 두루 살피고 적시(適時)에 현명한 판단을 내릴 어진 임금이 필요했다.
 
태조왕에게는 연나부 출신의 왕후 사이에 막근(莫勤)과 막덕(莫德)이라는 두 어린 왕자가 있었다. 냉혹한 수성이 왕위에 오른다면 잠재적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두 왕자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외가인 연나부는 그 당시 5부 중 가장 세력이 약해서 왕자들을 지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점찍은 인물이 바로 수성의 동생 백고(伯固)였다.
 
백고는 성품이 온화하고 학식이 높아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학문에 조예가 깊어 국정에 밝을 뿐 아니라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강단도 있었다. 백고가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이복 동생 격인 두 어린 왕자를 해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태조왕은 은밀히 좌보와 우보를 불러 후계 문제를 상의했다.
 
짐에게는 왕자들이 많소. 이중 누가 왕위를 잇는 게 이 나라를 위해 좋겠소? 막근이 적통이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고 외가인 연나부는 힘이 약해서 아무 힘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오.”
 
두 재상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짐은 백고가 적임이라 생각하오.”
 
재상들이 듣기에도 놀라운 발언이었다.
좌보 목도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백고 왕자가 훌륭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하지만 왕위를 잇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장자인 수성 왕자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미 많은 신하가 차기 왕으로 유력한 수성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적자인 막근은 나이도 어리고 그 외가인 연나부는 힘이 약해 후계 문제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연로한 태조왕의 명을 따를 자는 별로 없었다.
 
태조왕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수성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털이 거슬러 올라 있소. 자라면서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이 무엇이고 죽이는 것만 좋아하오. 그 포악한 성품으로 왕위에 오르면 나라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거요.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백고가 왕위를 이어야 하오. 짐은 경들만 믿겠소.”
 
태조왕의 간곡한 부탁에 우보 고복장이 묘안을 냈다.
 
수성 왕자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기습적으로 양위를 선포해야 합니다. 일단 왕위에 오르고 나면 어떤 세력이든 함부로 들고일어나진 못할 겁니다.”
 
그러다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찌하오?”
좌보는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우보가 밀고 나갔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기회를 보아 먼저 수성 왕자를 잡아 가둬야 합니다.”
태조왕은 고심 끝에 우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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