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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성을 빠져나온 을불은 며칠을 피해 다니다가 수실촌(水室村)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그는 신분을 숨기고 음모(陰牟)라는 사람 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초라한 행색만 봐서는 부역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처럼 보였기에 별 의심을 사지 않았다.
음모는 탐욕스럽고 악랄한 자였다. 그는 부역을 피해 온 양민이나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를 거둬들여 일꾼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품삯도 주지 않고 심하게 부려 먹었다. 을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중노동을 군말 없이 해내야 했다.
여름이 되자 음모의 저택 근처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그악스럽게 울어댔다. 집안 식구들이 밤잠을 설치자 음모는 을불을 시켜 밤새도록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지게 했다. 을불은 종일 일을 하느라 고단했지만 주인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개구리를 쫓으며 밤을 지새웠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을불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갔다.
‘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곳에서 수모를 견뎌 왔지만 더는 못 참겠다.’
을불은 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든 틈을 타서 음모의 집을 빠져나왔다. 일 년을 뼈 빠지게 일했건만 그의 수중에는 곡식 한 톨 없었다.
며칠을 걸어 다다른 곳은 동촌(東村)이라는 마을이었다. 며칠 동안 굶주린 을불은 마을 어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사내가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을불은 쉽사리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내는 그를 수레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정성 어린 간호를 받은 을불은 며칠 만에 정신을 차렸다.
사내는 기뻐하며 물었다.
“내 이름은 재모(再牟)라 하오. 소금 파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소.”
“저는 수실촌에서 온 을불이라 합니다. 음모라는 호부(豪富)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홀로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신세입니다. 며칠 전부터 식량이 떨어져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을불은 적당히 꾸며서 둘러댔다.
재모의 눈에는 을불이 평범한 농투성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더는 캐묻지 않고 동반자로 거두었다. 이때부터 을불은 재모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소금을 팔았다.
재모는 서쪽 해안가에서 소금을 사들인 후 압록수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인근 마을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 한번은 재모와 을불이 배를 타고 가다가 강 동쪽에 자리한 사수촌(思收村)에 내려 머문 적이 있었다. 그들이 묵은 집의 주인은 간특하고 욕심 많은 노파였다.
노파는 재모 일행이 자기 집에 머무는 대가로 소금을 요구했다. 재모는 소금 한 말을 퍼 주었다. 이 정도 양이면 열 명의 장정이 먹고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조금 더 인심 쓰시구려.”
“그 정도면 충분하오.”
재모는 무 자르듯 거절했다.
음흉한 노파는 속으로 앙심을 품었다.
‘네가 내 요구를 안 들어주고 무사할 성싶으냐.’
그녀는 사람들이 모든 잠든 틈을 타서 재모의 소금 짐에 자기 신발을 넣어 두었다. 노파가 방물장수에게 거금을 주고 산 가죽신이었다.
날이 밝자 아무것도 모르는 재모는 을불과 함께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이들이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즈음 뒤에서 노파가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저놈들 잡아라! 저 도둑놈들 잡아라!”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렸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노파는 다짜고짜 재모의 멱살을 잡았다.
“지나는 사람들 보시오! 이놈들이 내 가죽신을 몰래 훔쳐 달아났소!”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재모와 을불을 결박 지워 압록수를 관장하는 압록재(鴨綠宰)에게 끌고 갔다.
압록재는 노파의 고발을 듣고 재모를 심문했다.
“이 말이 사실이냐?”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도둑질이라니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노파가 재모를 흘겨보더니 압록재에게 하소연했다.
“어제 제가 저들 앞에서 가죽신을 자랑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지 않습니까. 값비싼 물건을 보고 욕심이 생겨 훔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들의 짐을 뒤져 보십시오. 분명 가죽신이 있을 겁니다.”
압록재는 부하 관원에게 짐을 수색하게 했다. 재모는 떳떳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짐을 뒤지던 관원이 노파의 가죽신을 발견했다. 장물이 나왔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압록재는 절도의 죄를 물어 재모와 을불에게 각각 곤장 50대를 친 후에 물건값의 10배를 소금으로 보상하게 했다.
소금을 뺏기고 매까지 맞은 두 사람은 아픈 몸을 이끌고 가까스로 강가에 정박한 배에 이르렀다.
뱃전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을불이 재모에게 사죄했다.
“이 모두가 저의 불운(不運)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어르신까지 곤욕을 치른 것 같아 송구할 따름입니다.”
재모는 좋은 말로 위로했다.
“그게 어찌 자네의 잘못인가. 장사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 법이라네. 개의치 말게나.”
을불은 뱃머리에 갈라지는 강물을 보며 처량한 마음을 달랬다.
이때 을불을 찾아다니던 소우는 압록 땅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돌아다녔지만 소득이 없어서 낙담한 상태였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나루로 나갔다.
별생각 없이 정박한 배를 쳐다봤는데 뱃전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초라한 행색이기는 했지만 어디선가 보았던 낯익은 얼굴이었다.
소우는 혹시나 해서 배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을불이 틀림없었다. 그는 기쁜 마음에 날듯이 배에 뛰어올랐다.
소우는 을불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왕손을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평범한 장사치일 뿐입니다.”
국왕이 보낸 자일지도 모르니 경계해야 했다. 다행히 재모는 볼일을 보러 하선했고 다른 선객들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속내를 짐작한 소우는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왕손의 편입니다.”
소우는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도성의 임금은 오래전에 인심을 잃었습니다. 모든 신하가 왕손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을불은 상대의 눈빛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을불은 소우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재모에게는 ‘먼 친척이 높은 관리인데 갑자기 죽어서 유산을 물려주었기에 돌아가야 한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처음 뵀을 때부터 예사 사람이 아닌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의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일이 정리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재모도 기쁜 마음으로 을불을 보냈다.
소우가 을불과 함께 돌아오자 창조리는 조맥(鳥陌) 남쪽에 은신처를 마련해 거사할 때까지 숨어 있게 했다.
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봉상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후산(侯山) 북쪽으로 며칠 사냥을 나갔다. 국상 창조리에게는 손쉽게 대신들의 뜻을 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냥이 끝나고 자축하는 자리가 벌어졌다. 많은 짐승을 노획한 자에게는 푸짐한 상이 내려졌다. 뒤이어 주연이 펼쳐졌지만 국왕은 금세 싫증을 느끼고 막사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국상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그대들이 지지만 해 준다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소.”
창조리가 나서겠다는 말에 대신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 역시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창조리는 좌중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뜻을 같이할 사람은 내일 사냥터에서 내 행동을 따라 하시오.”
신하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사냥에 나선 왕의 뒤를 따르던 창조리는 길가에 자란 갈대를 꺾어 관에 꽂았다. 이를 본 신하들도 똑같이 따라 했다. 이로써 모두가 한뜻임을 확인한 국상은 당장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도성으로 돌아온 국상은 소우와 조불을 따로 만나서 거사 계획을 알렸다.
“내일 저녁에 궁성을 수비하는 군사들에게 술을 내려 취하게 하겠소. 두 분은 가병과 함께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불화살이 오르면 즉시 쳐들어오도록 하시오.”
이튿날 저녁 창조리는 무사들에게 하인 복색을 하게 한 후에 수레에 술통을 싣고 궁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후라 궁성의 경비는 한층 삼엄했다.
수문장 구도량(仇道良)은 국상이 나타나자 황급히 군례를 취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수고가 많구먼. 낮에 폐하께 자네들의 노고를 말씀드렸더니 술과 고기를 내어 위로하라 하셨네. 궁중의 술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내 밖에서 구해 오는 길이네.”
“국상께서 미천한 저희를 이리 신경 써 주시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구도량은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창조리는 직접 구도량에게 술을 권하고 군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늘은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맘껏 먹고 취하도록 하라!”
수비병들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양껏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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