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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성문이 열리고 서안평의 군사들이 뛰어나왔다. 고구려군은 일제히 활을 쏘아 대응했다. 서안평군은 쓰러지는 전우를 뒤로하고 죽을힘을 다해 고구려 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서문 쪽에 있던 찰무의 고구려군은 양쪽으로 갈라져 밀려오는 서안평군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적의 예봉을 피하고 허점을 파고드는 찰무의 작전은 들어맞았다. 사마후군의 대오가 흐트러졌다. 창검을 든 고구려 군사들이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사마후의 군사들은 고구려군의 파상 공세를 당해 내기 어려웠다. 많은 군사가 고구려군의 칼날 아래 속절없이 쓰러졌다.
사마후는 종횡무진 말을 달리며 군사들을 독려하다가 고구려 창병에게 포위당했다. 창을 휘두르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고구려 군사가 던진 올가미에 걸려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수장이 사로잡히자 서안평의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투항하거나 달아났다.
서안평성 동쪽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서안평군의 초반 기세는 좋았지만 고구려군의 막강한 전력을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용맹하게 싸우던 염석도 고구려 군사가 던진 도끼를 등에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남은 서안평 군사들도 태반이 죽임을 당했다.
서안평의 군사들을 완전히 제압한 조불의 군대는 당당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찰무가 사마후를 결박해서 조불 앞으로 끌고 왔다.
조물이 사마후의 결박을 풀어 주며 은근히 말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소. 만약 항복한다면 폐하께 품해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소.”
조불의 회유는 먹히지 않았다.
“패한 장수는 죽음으로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해서야 되겠소. 정녕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 주시오.”
사마후의 흔들리지 않는 의기를 높이 산 조불은 즉시 그를 처형하고 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
조불은 도성으로 전령을 보내 서안평 점령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찰무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주둔시킨 후 귀환길에 올랐다. 이로써 고구려는 요서 지방에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서력 313년 서토의 화북에서는 중원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운 부족들이 곳곳에서 봉기했다. 그중에서도 흉노족 유연(劉淵)과 갈족 석륵(石勒)이 가장 강했다.
산서성 좌국성에서 거병한 유연은 진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한왕(漢王)으로 자처하며 일대에 세력을 떨쳤다. 이후 진나라 군대에 패한 석륵이 몸을 의탁하면서 유연의 군대는 더욱 막강해졌다.
유연이 죽고 아들인 유화(劉和)가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유총(劉聰)이 형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진의 회제를 잡아 죽였다. 왕위를 이은 사마업(司馬鄴)이 장안을 중심으로 진나라의 잔존 세력을 그러모으자 유총은 호시탐탐 공격할 틈을 노리며 대치했다. 이런 서방의 혼란을 지켜보면서 미천왕은 요동 정복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미천왕이 신하들에게 거병의 뜻을 밝히자 조불이 나서서 아뢰었다.
“지금 요동반도 남단에는 아직 낙랑의 세력이 건재합니다. 모본왕 때 압록강 일대에 거주하다가 몸을 피해 달아난 낙랑의 후예가 거점을 구축하고 이름을 교치(僑置)하여 선대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들은 삼한과의 중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덕분에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고 우리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큽니다. 언제든 틈새만 보이면 공격해 올 것이니 선수를 쳐서 요동 정벌의 교두보로 삼는 게 좋겠습니다.”
미천왕은 조불에게 군사 5천을 주어 낙랑을 정벌하게 했다.
이 무렵 진나라에 귀부한 낙랑은 군으로 봉해져 있었다. 낙랑군의 태수 장통(張統)은 패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고구려군의 침입에 놀라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고구려군은 주변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막강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정병이 채 3천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구원군마저 바랄 수 없는 시국이 아닙니까. 서둘러 항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군사 왕준(王遵)의 약한 소리에 장군 문원(文元)이 발끈했다.
“어찌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단 말이오! 고구려가 강하다고는 하나 힘을 다해서 싸우면 못 막아낼 것도 없소. 백성이 모두 가세하면 수적으로도 해 볼 만하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태수가 결론을 내렸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지지는 않을 것이다.”
장통은 각 현에서 차출한 장정들로 별동대를 구성하여 고구려군이 오는 길목에 매복시켰다. 치고 빠지면서 적군을 교란한 후에 정예병을 투입해 일거에 승기를 잡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지역은 본디 옛 조선의 땅이었고 백성 또한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 그들 눈에 수탈을 일삼는 한족 태수와 관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강제 징집까지 당해 억지로 끌려 나왔으니 싸울 마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내심 고구려군을 반기기까지 했다.
어느덧 고구려군이 조선현(朝鮮縣)에 이르렀다. 조불은 척후병을 보내 성안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는 뜻밖의 보고를 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성안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는 분명 적군의 흉계였다.
조불은 장수 여노(如孥)에게 군사 1천을 주며 일렀다.
“저 앞에 있는 고개를 보니 수풀이 우거져 군사를 숨기기에 적합하다. 아무래도 저곳에 적이 매복해 있을 듯하니 산길을 돌아 배후를 쳐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노는 군사를 이끌고 우회하여 고개 뒤편으로 갔다.
조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울목 고개에는 예상대로 낙랑의 군사들이 숨어 있었다. 조선현의 현령 조항(趙抗)은 고구려군이 서서히 고개를 올라오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저들이 곧 제 발로 함정에 들어서겠구나.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공격하라.”
현령의 수하 중에 막구(莫仇)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평소 자신들을 무시하는 한족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막구는 수하들을 불러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계획대로 조항과 한족 장수들을 잡아서 결박한 후 고구려군에 투항하자.”
이는 어젯밤 막구와 군사들이 함께 모의한 일이었다.
드디어 고구려군의 후위가 고개에 올라섰다. 조항은 군사들에게 공격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막구가 재빨리 조항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조항이 놀라서 물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막구는 대답 없이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그 사이 수하들이 한족 현령 조항을 포박했다.
고구려 장수 여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우리는 싸울 뜻이 없소!”
막구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포박한 현령을 끌고 여노 앞으로 갔다.
뒤늦게 도착한 조불은 막구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 크게 치하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이 손쉽게 조선현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장통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발을 굴렀다. 그 사이 고구려군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낭주벌로 향했다.
벌판에 도착한 조불은 일부러 늙고 약한 군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나머지 군사는 뒷산 언덕에 매복시켰다.
얼마 후 낭주벌에 당도한 낙랑 태수 장통은 고구려군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걱정했던 것처럼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장통은 장군 문식(文式)에게 기병 5백을 주어 고구려군을 치게 했다.
낙랑의 기병이 공격해 오자 조불은 장창병을 앞세워 앞을 가로막았다. 낙랑군은 고구려 군사들의 거마창 탓에 진격하지 못했다. 이에 장통은 보병을 지휘하는 문원에게 돌격을 명했다. 문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2천의 보병을 이끌고 고구려군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눌린 고구려의 본진이 조금씩 밀리는가 싶더니 앞선 대열부터 차츰 무너졌다.
앞장선 낙랑군 장수는 저 멀리 고구려군의 대장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았다.
‘대장만 잡으면 이 싸움을 쉽게 끝낼 수 있다.’
문원은 창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대장기를 향해 말을 몰았다.
적장이 달려오는 것을 본 조불은 겁을 먹은 듯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문원도 놓칠세라 말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둘의 간격이 좁혀졌다. 어느덧 문원의 창이 조불의 등에 닿을락 말락 했다.
문원이 창을 들어 조불을 힘껏 내리치려 할 때 고구려 장수 여노가 나타나서 앞을 막아섰다. 그는 백 근이 넘는 철퇴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낙랑 장수 문원 또한 용력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던 자였다.
두 사람의 창과 철퇴가 맞부딪치자 맑은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튀었다. 수 합을 나눈 두 장수는 서로의 힘에 탄복했다.
여노가 우렁차게 외쳤다.
“제법이구나! 내 철퇴를 제대로 받아 내다니!”
문원도 호탕하게 맞받아쳤다.
“네놈도 만만치 않다!”
두 장수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어울려 싸웠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쌍의 맹수가 서로 희롱하면서 노는 것처럼 보였다. 수십 합을 겨루었지만 좀처럼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여노가 철퇴를 크게 휘둘러 문원과의 거리를 벌린 후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문원은 기세등등하여 그 뒤를 따랐다.
여노를 추격하던 문원이 숲속에 이르렀을 때였다. 울창한 수풀 속에서 함성이 울리더니 고구려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원은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구려 복병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도망치는 줄 알았던 여노의 군사들까지 되돌아와 협공을 벌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전의를 상실한 낙랑군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문원은 안간힘을 쓰며 싸웠지만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날아오는 창칼을 간신히 피하고 있을 때, 별안간 철퇴가 날아와 머리를 강타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원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승기를 잡은 조불은 전군을 움직여 낙랑군의 본진을 공격했다.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당황한 낙랑 태수는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장통이 달아나자 대부분의 낙랑 군사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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