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현의 스포츠 세상] 남승룡의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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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따라 일본인을 꺾기 위해 시작한 마라톤
35살 보스턴서 태극기 달고 완주한 뒤 은퇴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16 06:31:00

오래전 미국 코넬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올림픽에 출전한 메달리스트들의 표정과 감정을 분석했다.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 얼굴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감정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겼다.

뿐만 아니라 경기가 끝나고 진행되는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보이는 감정도 동일한 방법으로 점수로 평가했다. 시상식에서의 감정을 점수로 평가하기 위해 은메달리스트 20명과 동메달리스트 15명의 시상식 장면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경기가 종료되고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나타났다, 비통보다는 환희에 더 가까운 점수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함께 나란히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오른 조선인이 있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이었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그늘에 가려졌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나라를 빼앗긴 서울 양정고보 1년 선후배 사이인 손기정과 남승룡은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때문에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2위로 골인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는 탈진 상태가 되어 거의 실신할 뻔한 반면 남승룡은 기운이 남아서 제자리뛰기를 했다. 제자리뛰기를 하며 손기정에게 축하의 말까지 건넸지만 표정은 어둡고 침울했다. 그의 동메달은 막판 스퍼트로 30명 정도의 선수들을 앞지른 결과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마라톤 종목 최초 동양인 우승자인 손기정은 마라톤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월계수로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지만 남승룡은 굳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남승룡은 시상대 위에서 바지를 치켜 올려 앞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손기정보다 양정고보 1년 선배인 남승룡은 손기정에 대해 “금메달이 아니라 월계수 화분이 정말 부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손기정은 금메달,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하는 업적을 이루며 두 사람은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 준 민족의 영웅이었다.

▲ 11월11일 전남 순천에서 열리는 제23회 순천 남승룡 마라톤대회 포스터.

전남 순천 출신의 남승룡이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는 간단하다.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 남초등학교) 시절 외사촌 형 정종호가 일본인을 제치고 마라톤 1위를 차지해 열렬히 환영받는 것을 보고 난 후였다. 일본인을 이긴 정종호는 시민의 추앙을 받았고, 그것을 본 소년 남승룡은 마라톤을 통해 나도 일본인을 꺾겠다고 작정했다. 형을 롤 모델로 삼아 마라톤에 정진한 남승룡은 보통학교 6학년 때 전남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나가 입상했고,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하기까지 학업과 마라톤을 병행하며 꾸준히 우수한 성적을 이뤄 낸 끝에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늘 실과 바늘처럼 붙어다녔다. 올림픽 영웅 손기정이 올림필이 끝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마라톤 은퇴였다. 세계 정상에 섰을 때 미련없이 내려왔고 후학 발굴에 나섰다.

손기정은 동반자 남승룡과 함께 그동안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미국에서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태극기를 달고 말이다. 1897년 처음 열린 보스턴 대회는 런던 마라톤·로테르담 마라톤·뉴욕 마라톤과 함께 세계 4대 마라톤 대회로 불린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미 42.195km의 풀코스를 뛰기에는 고령의 나이였다. 서둘러 신예 선수를 발굴하느라 전국 팔도를 다 뒤져도 인재가 없었다. 발품을 팔며 진흙 속에서 발굴한 인재가 서윤복이었다. 마라톤 경력이 일천한 서윤복을 우승시키기 위해 코치겸 페이스메이커를 자청한 사람이 남승룡이었다.

남승룡은 1947년 태극 마크를 붙이고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서윤복과 함께 12위를 차지하며 마라톤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서윤복은 남승룡과 손기정이 가르친 제자였다. 남승룡이 출전한 이유는 마라톤 초보인 서윤복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한 것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가슴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5살이었고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교통부에서 근무 중인 공무원 신분이었다. 태극기를 달고 뛰어 보고픈 한을 풀고자 출전한 보스턴 마라톤이 그에게 마지막 마라톤이었다.

전남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마라톤 발전에 헌신한 남승룡은 2001년 2월 작고할 때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2위에 입상한 송길윤도 많은 제자 중의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고난에 굴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떨친 남승룡을 기리기 위한 마라톤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로 23회째다. 남승룡 선생의 정신을 추모하며 늦가을 순천만 등 남도의 풍경을 맛보며 달리기를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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