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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비유왕은 다시 해능을 금성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깃털이 매우 아름답고 부리가 날카로운 매 한 마리를 예물로 보냈다. 매사냥에 주로 쓰이는 흔한 매들과는 달리 눈빛이 날카로웠다. 몸집은 크지만 상당히 민첩했다. 한번 날개를 펼치면 집채만 한 그림자를 만들었고, 발톱의 힘이 어찌나 센지 송아지도 움켜잡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쉽게 구할 수 없는 영물이었다.
매를 받아든 눌지왕은 굳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백제 왕이 보낸 매는 그가 기르고 있는 수십 마리의 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라 왕은 입이 귀에 걸렸다. 해능의 입가에도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졌다.
눌지왕은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백제 왕께서 짐을 이리 생각해 주시니 황송하구려.”
“이 모두가 양국의 화평을 바라는 우리 폐하의 마음입니다.”
감동한 눌지왕은 그 자리에서 백제와의 동맹을 약조했다. 물론 눌지왕이 단순히 선물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때 이미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묵인 아래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장수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신라 백성 역시 고구려의 지나친 간섭에 공분하고 있었다. 눌지왕은 백제의 지지를 업고 고구려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백제의 비유왕은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화친을 청한 것이었다.
장수왕의 거만한 태도에 신물이 났던 눌지왕은 드디어 고구려에 반기를 들고 백제와 손을 잡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는 길은 백제와 동맹을 맺는 방법뿐이었다. 눌지왕이 중대한 결심을 하기까지 기다려 준 비유왕의 세심한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로써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서막이 열렸다.
신라가 비밀리에 백제와 화친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장수왕은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북연 땅을 놓고 북위와 다투고 있었기에 당장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고작 신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조치였다.
북연 문제가 일단락되고 북위와의 갈등도 어느 정도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장수왕은 남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첩보를 통해서 백제와 신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세세히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신라를 쳐서 눌지왕을 처단하고 싶었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명분이 필요했다.
겉으로 보기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그지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이는 폭풍 전야의 고요일 뿐이었다. 물밑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반딧불만 한 불꽃만 튀어도 삽시간에 불바다가 될 듯했다.
불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솟았다.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인 실직주에서 고구려 장수 고차개(高車開)가 신라의 하슬라성주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차개는 국경의 수비를 맡은 간성(杆城)의 성주였다. 그는 호방한 성격에 비해 주변을 살피는 현명함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냥을 미친 듯이 좋아했는데, 간성에 부임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즐기곤 했다.
장수왕은 신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눈치챈 후로 변경에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은 고차개가 있는 간성에도 어김없이 하달되었다. 성주는 이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가 보기에 국경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접한 실직주는 물론 신라 동쪽 해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하슬라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고차개는 애당초 신라가 고구려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실정에 어두운 평양의 대신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과잉 대처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시간은 흘러 나뭇잎들이 제각각 울긋불긋한 옷으로 곱게 차려입는 가을이 찾아왔다. 하늘은 마치 쪽을 풀어 놓은 듯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시원한 바람이 어깻죽지를 간질이자 고차개는 참지 못하고 시중드는 군사에게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는 십여 명의 수하 군사만을 거느리고 성의 남쪽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몰이꾼으로 나설 군사들이 사냥개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고차개는 급한 마음에 점고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성문이 열리기 무섭게 앞장서서 뛰어나갔다. 수하 군사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성주를 쫓느라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성 밖으로 나온 고차개는 말을 타고 달리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니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산야를 가로질러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단풍이 한창인 울창한 숲 사이로 길이 숨바꼭질하듯 숨었다 다시 나타나곤 했다. 고차개는 말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주변 경관을 살폈다. 북쪽에서는 보기 힘든 활엽수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가지가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핏빛 낙엽이 바닥을 뒤덮었다. 고차개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잊은 채 풍경에 빠져 있었다.
이때, 간신히 고차개를 따라잡은 부장 여상(餘祥)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어찌 여기까지 와 계십니까? 온종일 찾아다녔습니다.”
정신을 차린 고차개가 우거진 가지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니 해가 서서히 기운을 잃어 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자연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이다.
고차개는 그제야 자신이 성 밖으로 나온 이유를 깨달았다.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이니 사냥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을 것이다.”
여상이 난처한 빛을 띠며 말한다.
“이곳은 오대산입니다. 실직주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말썽이 일어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실직주라 하면 신라의 영토였다. 남의 땅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사냥을 하다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사냥꾼도 아니고 고구려 장수의 신분이어서 양국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고차개는 목을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날이 저무는데 어디를 간단 말이냐. 이런 깊은 산중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고, 들킨다 한들 저들이 감히 우리를 어찌하겠느냐. 걱정하지 마라. 내 이곳이 마음이 들어 며칠 동안 머물 작정이다. 오늘은 풍광을 구경했으니 내일부터는 사냥에 나서리라.”
여상이 거듭 말렸지만 성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뒤따라온 군사들에게 야영을 준비토록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솥을 걸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군사들이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는 사이, 고차개는 침상에 걸터앉아 한나절의 감동을 되뇌었다. 아직도 환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머리가 맑지 않았다.
밥 짓는 연기가 우거진 나뭇잎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를 신호로 알았는지 하늘에서 먹장 같은 어둠이 드리웠다. 산중의 밤은 방심한 사이에 도둑처럼 찾아왔다. 어느새 사방은 컴컴해졌고, 무리 가운데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만이 빛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모닥불의 불빛은 따스한 이불처럼 고차개 일행을 덮어 주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군사들은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늦은 가을의 산중은 소름이 돋을 만큼 추웠다. 군사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닥불 주위에 자리를 잡고 서로의 몸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거친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마음이 흔들려 잠을 이루지 못하던 고차개는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막사 밖으로 나왔다. 스산한 바람이 그의 콧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성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군사들은 온종일 강행군하느라 지쳤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보초병조차도 창을 한옆에 떨군 채 코를 골았다. 모닥불은 사그라져 불씨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차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한쪽에 놓인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주워 꺼져 가는 불씨 위에 던졌다. 불길이 다시 생기를 얻은 듯 혀를 날름거리며 나뭇가지를 타고 솟아올랐다. 점점 살아나는 불길을 보고 있자니 지난번 사냥에서 잡았던 노루의 원망하는 듯한 눈이 갑자기 떠올랐다. 칠흑같이 까만 눈이었다.
노루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경동맥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자 피가 샘물처럼 솟아서 고차개의 얼굴을 적셨다. 핏물이 눈에 들어가자 세상이 온통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게 보였다. 손등으로 핏물을 닦은 후에 다시 노루의 눈을 쳐다보니 어느새 생기를 잃은 듯 어두워져 있었다.
솟구쳐 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어찌해서 노루의 죽음을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차개는 고개를 내저으며 피곤한 몸을 일으켜 다시 천막으로 들어갔다.
성주의 불길한 예감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사냥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인적이 드문 숲속이라 짐승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고차개는 살풀이하듯 활시위를 당기고 창칼을 휘둘렀다. 뒤를 따르던 수레는 사냥한 짐승들로 가득 찼다.
한바탕 사냥을 끝낸 고차개 일행은 간성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달려올 때는 몰랐는데 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둘러보니 웅장한 산의 정기가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차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갈 길을 재촉했다.
숲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더니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고차개 일행을 막아섰다.
그들 중 백발의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외친다.
“나는 하슬라성주 삼직(三直)이다. 보아하니 고구려 군사 같은데 어찌 우리 영토에 들어온 것이냐? 이는 도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삼직의 목소리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고차개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한 지붕 아래 식구와 같은데 내남이 어디 있겠소. 나는 간성 성주 고차개라 하오. 잠시 길을 잃어 이곳까지 이르게 됐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오.”
이쯤 얘기하면 신라의 장수가 순순히 물러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삼직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뒤에 있는 사냥감이 가득 든 수레를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뭔가?”
무안해진 고차개는 짐짓 언성을 높인다.
“내 이곳이 마음에 들어 사냥을 좀 했소. 무슨 큰일이라고 대고구려의 장수를 이리 겁박한단 말이오. 내 돌아가서 신라 조정에 정식으로 따지겠소.”
삼직은 엄포를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보아하니 저자들은 고구려군을 가장한 밀렵꾼이 틀림없다. 저자들을 살려 보낸다면 내 어찌 조정의 녹을 먹는 신하라 하겠느냐.”
고차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한갓 신라의 변방을 지키는 성주에게 밀렵꾼이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었으니 자존심이 강한 그로서는 참을 수 없었다.
고차개가 대로하여 칼을 뽑아 들었다.
“네놈이 알량한 군사의 머릿수만 믿고 이처럼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대고구려국 장수의 위용이 어떤지 보여 주마. 당장 칼을 들고 나서라!”
삼직은 고차개와 자웅을 겨룰 생각이 없었다.
“저들이 계교를 써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삼직은 이번에도 고차개를 무시하고 휘하의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5백에 달하는 신라 군사는 고차개 일행을 사방에서 에워싼 채 점점 간격을 좁혀 왔다.
고차개는 그들에게서 몸서리쳐질 정도의 살기를 느꼈다. 그와 부하들을 살려 보낼 뜻이 없는 게 분명했다.
고차개의 분노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신라군의 창칼과 기치 속에 갇히자 사방이 어둑해졌다.
여상이 숨을 헐떡이며 고차개에게 부르짖는다.
“소장이 어떡해서든 길을 열어 보겠습니다!”
고차개가 입을 열 사이도 없이 여상은 신라군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바람 부는 날 강물에 너울지는 노을처럼 여상의 장검이 춤을 췄다. 수풀은 신라 군사들이 흘린 피로 물들어갔다. 이를 보는 고차개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도 칼을 고쳐 잡고 신라군을 베어 나갔다.
한참을 싸우다가 바닥에 널린 군사의 시신을 밟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신라 군사의 장창이 고차개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연이어 무수한 창칼이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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