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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40] 나의 우주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우주가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9 06:30:10
 
나는 에바의 노트를 계속 읽었다.
 
시간이란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만든 허공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주는 너무나 거대해서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오늘 내가 죽는다고 해서 우주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인류 전체가 멸종된다 해도 그것이 우주의 비극이나 손실일 리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의 우주가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면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내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때 당신의 우주가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내 삶은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요.
 
세상이 함구하고 있는 궁극적 가치의 비밀은 나방처럼 반짝이는 유리창에 수없이 몸을 부딪치는 것, 아름다운 불꽃을 발견했다면 뛰어들어 재도 남기지 않고 불살라지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던질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 채 한 생을 소진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겠지요.
 
누구의 삶도 타인의 동의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최선을 다해 걸을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노트를 두 손에 꼭 쥐었다.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못한 수많은 말들이 서로 밀치고 올라오는 양 가슴이 메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선택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밑바닥에 바위처럼 단단히 눌러 놓았던 어떤 열망의 그림자가 마침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방은 어두웠습니다. 딱딱한 매트리스가 몸을 밀어 내는 것 같았지요. 나는 튕겨 나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듯 몸을 웅크리고 담요를 머리끝까지 잡아당겼습니다. 이불 속은 따뜻했지만 온기가 불안을 느슨하게 풀어 놓으면 다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불 밖으로 눈을 내밀었습니다. 흰 벽에 그려진 어둠이 일렁였습니다. 맞은편 유리창으로 들어온 새벽빛이었지요. 반쯤 쳐 놓은 커튼 사이로 검푸른 여명이 희미하게 밀려들었습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말고도 침대의 실루엣이 하나 더 보였습니다. 침상 옆 야트막한 헤드 테이블 위에 놓인 주전자와 물컵과 꽃병도 보였습니다. 어둠을 흡수한 검은 꽃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주위를 경계하듯 몸을 일으키고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흰색 무지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는 나는, 낯설었습니다. 베개 옆에 놓아 두었던 노트를 더듬어 찾았습니다. 서울을 떠나면서 준비해 온 노트 겉장의 부드러운 벨벳 감촉이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켜고 노트를 펼치는데 만년필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다리를 내려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었습니다. 맨발에 찬 기운이 휘감겼습니다. 건너편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댔고 낯선 목소리가 투덜거리며 돌아누웠습니다.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였지만 나 때문에 잠이 깨서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스탠드 불을 껐습니다. 침대 발치에 놓인 가운을 더듬더듬 걸친 다음 노트와 펜을 들고 방을 나왔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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