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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5∙18은 광주사태였다. 광주 시민도 빨갱이로 불렸다. 진실이 드러나면서 광주 폭동이 민중항쟁이 되었지만 5∙18 관련 예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진 바가 드물다. 5∙18 기념재단 등이 예산 확보를 위해 뛸 때 정부와 광주시 못지않게 국회가 적극적이었다. 국회라면 여야로 나뉘어 싸우기 바쁜 곳인데 누가 무엇을 했던 것일까?
과역 촌놈이 출세했다. 장가네 막내아들은 유독 공부를 잘했다. “선생님, 저는 광주일고에 갈라요. 원서를 써 주쇼!” 고흥반도 산동네에서 감히 광주제일고라니, 과역중 담임교사는 코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광주제일고는 해마다 서울대 합격생을 100명 이상 배출해 온 전라도 최고 명문고였다. 깡다구로 뭉친 장인식은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다.
신림동 고시촌은 전라도 촌놈에게도 기회의 땅이었다. 전국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신림동에 모였다. 1980년 5월 신림동에도 5∙18 광주 민중항쟁 소식이 들렸다. “고향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고시 공부를 하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가슴에 응어리가 생겼고 두 달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고 자책했다. 돌멩이와 화염병 대신 책을 들었던 고시생에게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은 커져만 갔다.
장인식은 독수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발톱을 갈고 닦아서 나중에 때가 되면 반드시 사용하고 말리라!” 고시 공부 1년 만에 입법고등고시에 합격했고 국회사무처에서 일했다. 입법조사관과 입법심의관을 거쳐 수석전문위원으로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입법 활동을 도왔다. 발톱이었던 입법 지식은 나날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던 어느날 예산을 확보하려고 동분서주하던 5∙18 기념재단 사무국장을 만났다.
“광주 분들을 위해 늦었지만 내가 할 일이 있구나!” 입법 전문가는 5∙18 관련 법에 따른 예산 확보에 힘을 보탰다. “민주화를 위한 헌신은 이미 알고 있으니 이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5∙18 기념재단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장인식은 “고향 분들을 위해 아주 조금 기여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 예산 확보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길 바랐다”고 회상했다.
장인식은 2022년부터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사무총장으로 일한다. A-web은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3년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 선거관리기구 국제 협력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설립을 주도한 덕분에 사무처는 인천 송도에 자리잡았다. 정부와 인천시는 A-web을 유치한 덕분에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다.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기쁘다던 장인식 총장은 예산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싸맨다.
올해 A-web 예산은 약 7억 원이다. 사무처 직원 인건비를 빼면 남는 돈이 고작 수천만원에 불과하다. 근거 없는 부정선거 논란 등으로 정부가 예산을 대폭 깎은 탓이다. 국제기구지만 출장비가 없어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직원이 퇴직하면 퇴직금을 마련하기조차 벅차다. 장인식 총장은 “사무처 직원 월급이 10년째 그대로다”면서 “최소한 물가상승률만큼은 올려 줘야 한다”고 푸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기구가 돈 문제로 쩔쩔매는 이유는 뭘까?
세상엔 모순이 많다. 박근혜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한때 윤석열을 욕했다.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지지자들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발판이었다. 이재명이 싫다는 감정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람은 저마다 이성을 앞세우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게 사실이다. 보수 정권(박근혜)이 A-web 설립에 앞장섰지만 A-web은 보수 정권(윤석열)에 밉보여 돈에 쪼들리는 신세다.
장인식 총장은 A-web 창립 10주년 국제콘퍼런스에서 말했다. “A-web은 세계적으로 자유롭고 공정하며 참여적인 선거를 실시하자는 비전을 갖고 여정을 시작했다. A-web 사무처가 모든 회원기관과 긴밀히 소통하고 경험을 교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외국 선거기관이 강연과 교육을 요청해도 출장비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할 때가 많다. 월급을 받지 않는 사무총장은 직원 월급을 걱정하느라 바쁘다.
노신사 장인식은 빚쟁이 신세다. 국회에서 일할 땐 예산 부탁을 받았지만 A-web에선 예산 책정을 부탁한다. 기획재정부 담당과장이 8월초 예산 편성에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자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유언비어 때문에 윤석열 정권에 밉보였는데 이재명 정권에서도 눈치를 봐야 하나? 아무래도 선관위와 대통령실에 찾아가 직접 설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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