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는 이두로 표기된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이다.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서라벌(경주) 아이들을 동원하여 퍼뜨린 노래다. 우리는 훗날 백제 30대 무왕이 되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혼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렇게 믿는다. 과연 두 사람의 혼인은 역사적 사실일까?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 여부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은 오직 『삼국유사』에만 나온다. 〈기이〉 무왕편 기록이다. 전반부는 서동설화이고 후반부는 미륵사 창건설화이다. 창건설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무왕은 즉위이후인 서기 602년(무왕 3년)부터 신라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무려 13차례나 전투를 벌인다. 백제의 역대 어느 왕도 무왕처럼 줄기차게 신라와 전투를 벌인 왕은 없다.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비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2009년 익산 미륵사의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명문은 가히 충격 그 자체이다.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귀족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沙宅) 왕후이다. 또한 미륵사 창건을 봉양한 사람도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이다.
그렇다면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혼인은 정말로 사실일까? 서동설화는 일연의 착각인가? 아니면 일연의 창작인가?
무왕의 출신에 답이 있다. 무왕의 어머니는 부여(사비) 궁남지 출신의 미천한 과부이다. 어느 날 연못의 용(위덕왕)과 정을 통해 무왕(서동)을 낳는다. 이후 어떤 사유로 궁남지에서 살지 못하고 익산 마룡지로 거처를 옮겨 무왕을 기른다. 무왕은 마동(마를 캐는 아이)으로 성장한다. 일연이 기록한 서동설화가 사실이라면 무왕은 이 시기 선화공주와 혼인한다.
무왕의 세력기반은 전북 익산이다. 28대 법왕이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백제는 차기 왕통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사택가문의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이 결탁하여 무왕을 옹립한다. 당연히 왕비는 사택가문의 몫이다.
선화공주는 무왕 즉위 전에 사장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화공주는 무왕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설화 기록은 선화공주를 왕후(왕비)가 아닌 부인으로 기록한다. 이로써 무왕이 즉위이후 13차례나 신라와 격하게 전쟁을 벌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무왕은 선화부인이 사망하고 없기에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특히 무왕은 정실소생의 적자가 아니다. 어머니는 미천한 과부 출신이다. 이는 무왕의 최대 약점이자 또한 극복 대상이다. 이런 까닭에 무왕은 보다 적극적으로 신라에 대해 적대정책을 펼친다.
서동설화 주인공은 백제 무왕이다. 『삼국유사』가 서동을 무왕으로 단정한 것은 참조한 옛 문헌이 모두 무왕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화부인과 사택왕후 두 사람의 존재도 사실이다. 다만 두 사람은 시간적 차이가 있다. 선화부인은 무왕이 즉위 전에 얻은 부인이고, 사택왕후는 즉위 후에 새로 얻은 정실왕비이다.
역사는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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