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전문가칼럼
박병헌의 스포츠 세상
프로야구 코치로만 28년째… 재일교포 최일언의 한국 사랑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1-08-12 10:00:08
 
▲박병헌 언론인·전 세계일보 체육부장
日 프로야구 포기하고 고국행
도쿄올림픽서 처음 태극 마크
프로정신으로 뭉친 투수조련가
야구의 꽃 사령탑 오를지 관심
 
8일 폐막한 제32회 도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투수코치는 재일교포 최일언이었다. 오로지 야구 하나를 위해 한국 땅을 밟은 지 어느덧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선수로서 그리고 코치로서 쉼이 없었다. 그는 도쿄올림픽에 출전해 현지에서 환갑을 맞았다.
 
우완 정통파 투수였던 그는 도쿄올림픽에서 처음 지도자로서 태극 마크를 달았다. 선수 시절에도 태극 마크를 달아본 적이 없었다. 1995년 한·일 프로 올스타팀 간의 대결인 슈퍼게임 때 투수 코치로 한·일전을 치르기는 했지만 국가대표는 아니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태극 마크는 부담스러운 상징이기에 한사코 거절했지만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1984년 OB베어스에서 인연을 맺은 야구대표팀 김경문 감독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형님뻘 되는 김 감독은 최일언 코치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선수 시절 최일언은 OB의 선발투수였고, 김경문 감독은 포수였다. 한마디로 눈빛만 봐도 생각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배터리(투수·포수의 조합)’로서 명콤비를 이룬 사이였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투수지도 전문가 중 한 명인 최일언은 ‘야신’이라고 불리던 김성근 감독에 의해 발탁돼 KBO리그에 입성할 수 있었다.
 
봉황대기 야구대회 때 조국 방문
 
매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열리는 봉황대기고교야구 대회에도 출전했던 최일언은 일본 센슈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일본프로야구 입단을 목표로 좋은 조건을 받고 사회인 야구에 갈 예정이었으나 봉황대기 때 재일동포팀 감독이었던 한재우의 설득으로 KBO리그로 방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프로선수 생활은 조국에서 짧고 굵게 5년간 뛰었다.
 
OB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출신에다가 자신과 같은 일본 사회인 야구 출신이었던 최일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사회인 야구는 갓 출범해서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던 KBO리그보다 수준이 높았던 게 사실이다.
 
일본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최일언은 중학교 때까지는 정식 야구부가 아닌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야구 명문 시모노세키상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토록 바라던 고시엔 무대를 밟아 여느 탈락한 팀 선수처럼 흙을 퍼갔다. 그 흙은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고시엔 대회에 한번 출전하는 게 영광이어서 참가 선수들은 고시엔 구장의 흙을 퍼가는 게 관례로 돼 있을 정도다.
 
짧고 굵은 KBO리그 선수 생활
 
최일언은 KBO리그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KBO리그에 보급되지 않았던 포크볼을 제대로 선보인 역대 최초의 포크볼 투수였다.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이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장명부·김일융·김무종 등 기라성같은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이 명멸했지만 최일언만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OB 입단 첫 해부터 167.2이닝을 던지며 9승을 기록했고, 특히 입단 3년차였던 1986년에는 19승 4패 방어율 1.58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이때 승률 타이틀을 수상하면서 선동열의 4관왕을 저지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최강 멤버였던 해태타이거즈를 상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등판한 경기에서 13연승을 거두며 ‘해태 킬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등판하지 않는 날에도 덕아웃에서 경기 내용을 1구 1구 체크해가며 상대 타자의 장단점을 연구하는 등 KBO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 스스로 부단히 노력했다. 김성근 감독이 같은 재일교포인 최일언을 매우 아꼈던 이유다.
 
늘 연구하고 공부하는 지도자
 
학창시절에 학업 성적이 뛰어났다는 최일언의 이런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는 지도자 생활 때에도 쭉 이어졌다. 틈틈이 전문 서적을 읽고 실제로 시험해 보는 게 생활화돼 있다. 이러한 노력이 그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92 시즌을 마친 뒤 은퇴한 최일언은 조국에 정착했다. 친정팀 OB베어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명환·진필중 등을 지도했고, 커브·체인지업·포크볼 등 구종 전수를 하며 유망주들을 키워 유능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한화이글스와 SK와이번스 코치로 활약하다가 새로 창단하는 NC다이노스로 옮겨 초대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NC가 성장하는데 기초를 튼튼히 닦았다. 이때 NC의 사령탑도 김경문 감독이었다. 프로야구 제9구단인 NC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등 단기간에 강팀으로 성장한 이유 중에 투수 조련에 일가견 있는 최일언의 숨은 노력과 공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프로야구 구단의 전력은 투수가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이 놀 때 놀고 남들 훈련할 때만 훈련하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올라가지 못한다는 게 그의 지도 철학이다. 자기 직업에 철두철미한 프로정신으로 잔뜩 무장돼 있었기에 50대 초반의 감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KBO리그에서 그는 코치로서 아직도 이름값과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2020년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투수코치를 해왔다는 점에서 최일언의 프로정신과 코칭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국내 야구에 대해 투수들의 연습량이 적다며 쓴소리를 한다. 사회적인 분위기 탓인지 훈련량을 줄이는 것이 미덕처럼 보이고 있어 무척 아쉽다는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흔한 강속구 투수가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훈련량의 차이라는 게 투수 조련 전문가 최일언의 견해다.
 
현장으로 컴백해 행복하다
 
최일언은 지난해 11월 시즌이 끝난 뒤 LG와의 계약기간이 끝나 일본으로 떠났지만 다시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5개월간의 공백은 한국에 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4월 말 LG와 투수 인스트럭터로 계약하며 컴백한 그는 현장에서 야구팬들과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좋고 행복하다고 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다.
 
환갑을 맞은 최일언이 앞으로 얼마나 국내 야구 무대에 설지는 모른다. 그는 감독의 참모 역할인 코치 생활만 28년째다. 39년 역사의 KBO리그 무대에는 그간 일본인 감독도, 미국인 감독도 여럿 있었다. 재일교포 최일언이 ‘야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프로야구 사령탑에 오를 날을 손꼽아 기다려보는 것은 무리일까.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11
감동이에요
13
화나요
0
슬퍼요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