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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조선왕조는 기자조선을 계승한 나라다
기자동래설·기자조선,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이 만들어
이이의 최종 정리로 허구의 기자조선 천년 가까이 존재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8-12 09:42:09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정변으로 은나라를 무너뜨린 주 무왕은 백성의 동요를 염려해 논공행상을 행하면서 은 왕실의 친척들을 개국 공신들과 함께 제후로 봉했다주왕의 아들 녹부(祿父)를 은의 도읍지 조가(朝歌)를 다스리는 제후로 봉했고일등공신인 강태공을 제()동생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각각 노()와 연(땅에 봉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은삼인(殷三仁)이 있었는데, 은나라 주왕의 숙부였던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이복형 미자(微子)가 그들이다. 비간은 간언하다가 처형되었고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해 노비가 되어 투옥되었다. 미자는 왕실의 제기를 가지고 떠나갔다. 이 중 기자는 우리 역사와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또는 수유(須臾)이다은나라가 주 무왕에게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한 기자가 주 무왕에게 봉함을 받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약 천 년간 지배한 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기자에 대한 최초 기록은 서경(書經)의 주 무왕 13(B.C 1117) 갑옷을 입고 천하를 평정해 상나라의 정치를 뒤집고 옛 정치를 따르도록 했으며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했다. 13년에 왕이 기자를 방문했다(惟十有三年春 一戎衣 天下大定 乃反商政 政由舊 釋箕子囚... 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라는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 천 년간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는 기자조선.
 
상서대전(尙書大傳) 홍범(洪範) 편에는 무왕이 은을 이기고는 공자 녹부에게 계승시켰고 기자를 감옥에서 석방했다. 기자는 주에 의한 석방을 용인 못 해 조선으로 갔고 무왕이 듣고는 조선에 봉했다. 기자가 이미 주 무왕의 봉함을 받았으나 부득이 신하의 예가 없었기에 13년에 입조했다. 무왕이 그 자리에서 홍범에 대해 들었다라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문)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聞洪範.
 
이상한 점은 감옥에서 풀려나자 조선으로 가버려 이미 은나라 땅에는 없는 기자를 주 무왕이 굳이 조선에 봉했다는 이유가 뭔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이 주나라의 통치강역이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는데 조선에 봉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도 기자라는 자는 은 주왕의 친척이다그리하여 무왕은 마침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가 아니었고 그 후 기자가 주 조정에 알현했다(箕子者紂親戚也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其後箕子朝周)”라는 기록이 있는데,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으나 신하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신하도 아닌 기자가 알현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 자주국가에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시킨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KBS역사저널 그날]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받았다. 국호가 조선이니 우리는 당연히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했겠으나 그게 아니라 중국(주나라)에게 제후 봉함을 받은 기자조선의 이념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삼봉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의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해동에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이라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바로 그들이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고는 중국의 명령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했다.
 
그러나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께서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니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셨는데 아마도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하신 것이리니 이미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롭게 된 것이다. (생략)
 
이제 아름다운 국호 조선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듯이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오늘날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이하 생략)
 
▲ 조선왕조 때 평양에 조성된 기자릉. 조선조는 단군조선이 아닌 중국 주 무왕한테 제호 봉함을 받은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 [필자 제공]
 
이후로 위에서 언급한 이상한 기록들을 근거로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이라는 괴물이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율곡 이이에 의해 최종 정리되어 집대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허구의 기자조선이 천년 가까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는 몇 가지 이유로 기자조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첫째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의 발견이 없는 데다가 둘째 문헌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셋째 정황상으로도 그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지적의 근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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