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1960년대 명 편집기자 권도홍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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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 동아일보 지면 ‘최후의 보루’ 명성
타계 1년… 편집에 대한 헌신은 지식사회의 보물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29 06:31:10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정치인 김종필은 말했다. 엄살이고 과장이다. 신문기자만큼 허업이 또 있을까. 하루하루 신문은 그날의 역사이지만 며칠 지나면 구문(舊聞)이 되는 속성 탓일까? 일제 때부터 기자였던 애칭 ‘홍박’의 홍종인, 동아·조선일보를 오가며 편집국장을 한 천관우 등 거물조차 지금은 존재가 희미하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은 누렇게 변색된 지면에 갇혀 있다.

더 안타까운 건 편집기자다. 취재기자와 달리 그들은 익명이다. 지면 레이아웃을 하고 제목을 다는 내근직이라서 독자는 그들을 알 리 없다. 그럼에도 종이신문 편집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60년대 꼴등 조선일보를 벌떡 일으켜 세운 것도 편집의 힘이었다. “화려한 편집과 특종이 우릴 살린다”고 독전하던 오너 방우영(1928~2016)의 승리라는 걸 세상이 다 안다. 사실 신문쟁이끼리는 “신문은 제목 장사”라고들 말한다.

오늘은 전설적 편집기자 권도홍(1932~2022) 얘기다. 그는 딱 1년 전 이맘때 타계했다. 문제는 당시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이 쓴 문화일보 부음기사가 전부라는 것이다. 직후 한국편집기자협회보에도 추모 글이 실렸지만 쓸쓸하다. 기자가 허업이라지만 이럴 수가 없다. 이 회장의 회고대로 60년대 동아일보 전성기 때 권도홍은 그 신문의 마지막 게이트 키퍼가 아니었던가.

부실한 기사를 톱으로 하자며 들고 온 취재부장의 원고를 “이게 기사요?”하며 면전에 내던졌고, 그때 허공에 날리던 원고뭉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그는 술회했다. 권도홍의 위상은 막강했다. 사장·편집국장을 타고 내려오는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매번 쳐냈다. “삼군(三軍)을 거느리는 장수는 사로잡아도 한낱 사내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게 그의 기개였다.

1960년대 최고 권력자이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당시 동아 정치부장 유혁인(대통령 정치특보 역임)을 통해 단 둘만의 은밀한 만남을 청해 왔던 일도 있다. 동아일보 ‘숨은 실세’인 권도홍이란 철벽을 함락시키려던 음모일 텐데, 그가 그걸 발로 걷어찼음은 물론이다. 그럼 그가 만든 지면은 어떤 걸까? 여기 있다. “개헌안 공화, 전격 변칙 처리.” 시커먼 컷이 강렬하다.

그건 1969년 9월14일 대통령 삼선개헌안 관련기사다. 정치부에서 넘어온 기사는 “변칙 통과”라고 비교적 부드럽게 표현했다. 사장과 편집국장도 그 용어를 쓰길 원했다. 아니 지시했다. 그 모든 걸 깔아뭉개고 권도홍이 새 제목을 단 게 “변칙 처리”다. 그게 그거 같다고? 아니다. 동아일보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에 온 세상이 꿈틀대던 그 시절을 떠올려야 감이 잡힌다.

그런 천하의 권도홍이 당시 편집기자 사천왕, 즉 빅4를 뽑았던 적이 있다. 조선일보의 김경환·조영서, 한국일보의 최정호·김성우가 그들이다. 김경환은 제목 감각은 시원찮아도 “한국신문 100년사에 처음인” 압도적 레이아웃으로 조병옥 박사 별세 등 빅뉴스의 실감을 전했다는 게 권도홍의 평이다. 조영서는 감각적 제목의 달인이다. 인류가 달을 처음 밟았을 때 그가 단 제목이 “달이 숨쉬기 시작했다”다.

▲ 삼선개헌 변칙 처리를 보도한 호외를 재록한 1969년 9월15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중앙정보부의 끈질긴 공작에도, 그리고 사장실의 개제(改題) 지시에도 끝내 ‘변칙 처리’를 관철한 당시 권도홍 편집기자 의지의 표징이다.

4·19 희생자 합동 위령제 때 김성우의 제목도 멋졌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였다. 대중가요 가사를 차용한 심금을 울리는 제목이다. 그런 당대의 편집기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독자 세계를 구축했던 권도홍은 경남 창령 영산이 고향이다. 학력은 보잘 것 없다. 동아대 1년 중퇴에 실은 고등학교 야간부도 다니다말다 했다.

그런 학력으로 부산일보에서 시작해서 한국일보 장기영의 품에 안겼다가 방우영의 구애에 못 이겨 조선일보에도 잠시 근무했다. 1년을 못 채우고 끝내 동아일보로 건너가서 편집의 꽃을 피웠다. 그럼 편집 장인 권도홍의 재주는 타고난 것인가? 아니다. 그만큼 국어를 사랑하고 영어·한문·일어 등 언어에 두루 밝은 이도 없다. 광복 직후 열세 살 때엔 홍명희의 ‘임꺽정’을 사흘 만에 완독했다.

기자생활 이전 정지용의 ‘문학독본’을 너덜너덜할 정도로 읽으며 글 감각을 익혔다. 타계 전까지도 ‘한서(漢書)’ ‘구당서(舊唐書)’등 한문 전적에 감싸여 살았고, 때론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를 읊었다. 아쉽다. 언어가 시들고 신문이 죽은 시대 권도홍이란 멋쟁이를 환기시키려 했는데 하다 보니 절반도 못했다. 그런 고인은 요즘 신문을 어떻게 볼까.

“한마디로 맥이 빠졌다. 엄청 증면이 됐지만 밀도와 재미가 없다”는 평가에 공감한다. 역설이지만 가로쓰기 도입 이후 신문이 푸석푸석해진 게 사실이다. 신문업계 숨은 거물 권도홍을 오늘 새삼 떠올리는 이유다. 후배 이재학 군과 함께 은퇴 기자 권도홍의 품격을 배우던 10년 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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