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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한글날 등 5대 국경일이 2개나 들어 있는 10월, 개천절의 문제점과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개천절이 더 유의미한 국경일로 성립하려면 먼 옛날 신화시대 의식을 공유하기보다 자유민주공화국 관점에서 정리돼야 마땅하다고 본다.
단군신앙의 대종교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20세기 초 특히 일제시대 들어서다. 조선왕조 내내 망각 내지 은폐된 상고사가 구전 중심으로 전승되다 단행본이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유대인들이 절체절명 위기에서 모세5경 등을 기록해 구약성경을 이루어 낸 배경과 다르지 않다.
중·근동지역의 신화·전설·민담 등이 BC 8~BC 6세기 유대인 민족사로 재구성됐듯 단군조선 이야기 역시 유라시아 내 여러 건국신화들과 이리저리 겹친다. 그것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창조적 재편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게 특정 역사 상황에서 절실해지며 기록돼 정체성의 근거이자 매개가 된다.
중화문명이 가진 본질적 위험성에 관심을 가지면 역사공정에 대한 대항 논리를 찾기 마련이고 동북아 및 유라시아 상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단군(檀君)이란 제사장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며 어떤 고대어의 음차(音借)임을 확신하게 된 것은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덕분이다.
카자흐스탄·몽골에 유학한 저자 김정민 박사에 따르면 탱그리(=하늘·천신)→당골레(무당)→단골이 된 존재의 흔적이 오늘날 호남 방언 등에 남아 있다. 부족 연맹을 의미하던 ‘주잔’ ‘주스’의 음차 ‘조선(朝鮮)’처럼 한자를 빌어 ‘소리’를 표기한 무수한 사례의 하나라는 주장이 중국학 전공자에겐 깊이 공감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창세기가 그렇듯 단군신화 역시 널리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특정 공동체의 정체성 위기 속에서 ‘자기중심적으로’ 기록되며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 재구성·재해석돼 민족사의 기원으로 발전했다. ‘홍익인간’처럼 적극 되살릴 만한 부분과 함께 경계해야 할 부작용이 엄존한다. 오늘날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개천절·단군기원(檀紀) 존숭의 역사관이 자유민주공화국 세계관·가치관과 어디까지 양립할 것인지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한민족에겐 기원전 2333년 건국이 있을 뿐”이라며 “(대한민국 건국 전) 국가가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보수·진보, 좌·우 할 것 없이 ‘민족’ 화두 앞에선 숙연해진다. ‘국뽕’ 내지 ‘반일’ 논리에 수렴될 국사 중심의 국민교육 체계는 ‘박정희 근대’의 효율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뛰어난 가성비를 보였으나 패망에 이른 일본근대의 압축판이 가진 어두운 측면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놓인 배경도 공산당 이력 문제가 항일투사 이미지의 위대함을 이기지 못한 결과, 즉 ‘민족’이라는 마법어의 위력인 것으로 보인다. 흉상 설치 때 재직한 김완태 전 육사 교장이 문재인정부의 압력을 부인했다. 그의 전후 행보로 볼 때 문 정부 편을 드느라 하는 말 같진 않다.
서구근대의 개념 ‘네이션’이 일본에서 ‘民族’으로 번역돼 우리말 ‘민족’이 되면서 ‘네이션=헌정시스템 속 가치·시장 공동체’가 ‘혈연·습속 공동체’로 와전됐다. 사실상 ‘종족’ 개념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 현상을 우려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 및 그 직·간접 지지자들이 내세워 온 ‘우리민족끼리’의 ‘민족’과 혼동된다는 사실에 있다.
국경절엔 ‘왕국·백성(종족)’ 대신 ‘(근대)국가·국민’의 정체성이 드러나야 한다. 권력자 생일을 국경일 삼는 나라와 현대국가의 차이다. 정치·운명공동체 자각의 폭발적 계기가 3·1운동이라면 그런 공동체로 발전할 독서 시장을 빠르게 성장시킨 게 한글이다. 3·1절과 한글날의 국경일 자격은 차고 넘친다. 제헌절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것은 ‘헌법의 가치’가 그간 충분히 강조되지 못해서다.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아닌 1945년 일제 패망의 날을 ‘8·15’로 기념해 온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말 나온 김에 ‘국군의 날’ 얘기도 해 보자. 6·25 당시 반격 끝에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에서 유래했으니 이날은 소멸 직전의 대한민국이 회생한 날이다. 국가란 전쟁을 통해 태어나거나 사라진다. 처절한 전쟁을 통해 탄생·유지된 나라일수록 관련 서사를 통해 강한 생명력을 누린다. 물론 그 해석을 대다수가 공유할 때 얘기다. ‘한민족’이 곧 ‘하나의 네이션’을 의미하진 않는다. 6·25를 둘러싼 두 가지 관점,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된 민족해방전쟁’과 ‘대한민국 건국 완결 전쟁’은 ‘하나의 네이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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