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문학이 죽은 시대, 김수미의 산문 왜 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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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행복한 유년 시절 회고는 단연 압권
당장 푸짐한 언어로 회심의 자서전부터 쓰길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07 06:31:20

지난주 고백했던 ‘글쟁이 탤런트’ 김수미에 대한 관심은 뜻밖에도 최근에 봤던 그의 신앙 간증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꼭 1년 전 간증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특히 1960년대 초 숭의여중 시절 서울시 백일장대회에 나가 장원을 따먹은 얘기에 배꼽을 쥐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전북 군산에서 막 올라와 심한 사투리를 쓰던 김수미는 성적만은 전교 1~2등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김수미는 심한 사투리를 쓰는 촌년으로 통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쇳대(열쇠의 사투리)란 별명까지 붙었다. 담임이 양호실에 가서 약 좀 갖다 달라고 심부름시켰던 게 발단이다. 달려가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돌아와서 “선생님, 쇳대가 없어요. 쇳대가” 하며 큰일이 난 듯 호들갑을 떨자 교실이 삽시간에 와, 하고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김수미가 나름 복수극을 꾸몄다. 그게 니미뽕 사건. 친구들이 “얘, 너네 시골에선 잉크병을 뭐라고 하니?” 하며 놀리듯 묻자 “응, 니미뽕이라고 해” 하고 천연스레 대꾸해 버린 것이다. 다음 날 당장 학부모들이 촌년 하나가 우리 애들 망친다고 들고일어났다. 등교 때 덩치 큰 배구부 여학생들이 대뜸 멱살부터 잡았다. 김수미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되받아쳐 버렸다.

“우리 군산에선 다 그렇게 부르는데 나보고 어쩌라구? 이 XX아.” 여기서 밀리면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혀 퇴학당한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했던 것이다. 때 아닌 난투극이 벌어졌고, 달려온 담임이 단 한 방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어머나, 우리 시골에서도 잉크병은 니미뽕이거든.” 충청도 출신 김숙자 선생님의 기막힌 순발력이 위기의 김수미를 살렸다. 얘기는 지금부터다.

이듬해 김수미는 백일장대회에서 그때 쇳대와 니미뽕 사건을 대뜸 글로 썼다. 제목이 이랬다. ‘선생님 고향이 어디시길래?’ 그게 장원을 탄 문제의 글이다. 소녀의 센티멘탈리즘이나 그럴싸한 문학적 헛소리 대신 리얼리티로 승부를 낸 셈일까? 더 대박은 아침 조례 때 교장 선생님이 상을 주면서 “그동안 쇳대라고 놀린 거 사과합니다. 여러분도 다 사과하세요”라며 절을 한 사건이다.

맞다. 그에게 글은 그때도 지금도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가 대학 국문과를 졸업해 작가의 꿈을 꿨던 것도 자연스러운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김수미는 초등생 때 간첩 표어 공모전에서 상도 탔던 경력도 있다. 당시 부상으로 고가품인 아이디얼미싱과 쌀 한 가마니도 챙겼다. 그 전에 간첩 허위신고 사건으로 흠씬 얻어터졌던 꼬마 김수미 집념의 승리였다. 그런데 당시 수상작 표어가 놀랍다.

‘옆 사람도 다시 보자. 수상하면 신고하자’ 한 시절을 풍미했던 표어가 꼬마 김수미의 작품이었다니. 아버지가 재능을 알아보고 막내딸의 서울 유학을 결심했던 것도 이해 못 할 게 없다. 농사짓던 아버지는 한여름 원두막에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좔좔 낭송하던 분이셨다. 그런 그가 고구마밭을 팔아 막내딸 유학 자금을 대겠다는 큰 결심을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서울 남산 해방촌에 쪽방을 얻어 자취 생활하던 여중생 김수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기서 물어보자. 만일 그가 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했을 경우 박완서 같은 큰 작가가 됐을까? 그건 보장 못 한다. 지나치게 먹물을 먹은 나머지 ‘문단이란 감옥’에 갇혀 자기 특색을 잃어버린 채 고만고만한 글쟁이로 전락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게 있다. 우리말에 대한 목마름, 문학에 대한 갈증을 김수미처럼 품어 온 사람도 드물다. 그는 옛 산문에서 뜻밖에도 여성시인 노천명의 옛시에 등장하는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란 표현이 얼마나 멋진가를 고백한 바 있다. 오래 잊고 살던 시,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를 다시 읽어 봤다. 너무 좋았다. 김수미의 숨은 정서도 짐작됐다.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문학이 죽은 시대, 예전보다는 썩 잘살지만 모든 게 심드렁해졌다. 이런 때 김수미의 산문을 보며 썩 특별한 경험을 했음을 나는 이 지면에서 전했다. 이참에 희망 사항도 밝힌다. 김수미, 당신 이참에 자서전 하나 써 내길 바란다. 특히 가장 행복했다는 유년 시절을 정교하게 복원해 달라. 잘하면 유년 시절 회고만큼은 장편 ‘태평천하’의 채만식에 비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날 수 있다. 채만식도 전북 군산, 정확하게는 옥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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