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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3] 서해의 낙조 ①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새롭게 뜨는 달과 같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9 06:30:10
 
 
얼마 후 밖에서 시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좌평 임자가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풍문의 근원지를 조사하라고 보냈던 임자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
의자왕은 즉시 침실의 문을 열고 나와 대전으로 향했다. 앞마당에 임자를 비롯한 관원 수십 명이 도열해 있고 그 앞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국왕은 갑작스러운 거북이의 등장에 의아하여 물었다.
어제 궁궐 인근에서 귀신이 사라졌다는 지점을 파 보니 이처럼 큰 거북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등에 이상한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임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거북의 등을 가리켰다.
의자왕은 마당으로 내려가 글귀를 직접 확인했다.
 
百濟同月輪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新羅如月新 신라는 새롭게 뜨는 달과 같다.
 
국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소신이 보기에 예언인 듯하여 이름 있는 무당을 데리고 왔습니다.”
임자가 데리고 온 무당이 국왕 앞에 나서며 예를 갖췄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의자왕의 물음에 무당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임자가 재촉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 뜸을 들인단 말이냐! 냉큼 아뢰지 못하겠느냐!”
무당은 임자가 찾아와서 거북의 등을 보여 줬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천수가 다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거짓말로 국왕의 비위를 맞추면 살 수는 있겠지만 하늘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둥근 달은 이미 꽉 찼으니 이제 기울 일만 남은 겁니다. 이는 백제가 쇠락하리라는 뜻입니다. 달이 새롭게 뜬다는 것은 번영을 뜻하니 앞으로 신라가 번성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늘이 폐하께 내리는 경고인 듯합니다.”
의자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때, 임자가 나서며 무당을 꾸짖었다.
요망한 것이 폐하의 성총(聖聰)을 흐리는구나! 저자를 당장 끌어내라!”
무당은 앙연히 고개를 들고 외쳤다.
기왕 이리된 마당에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성충·흥수와 같은 충신을 내쫓고 저런 간신과 요녀만 가까이하십니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시고 저 간신배를 베어 버리십시오. 그래야 사직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부디 통촉하옵소서.”
무당은 죽음을 각오한 듯 가슴에 품은 말을 쏟아 냈다.
 
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감히 국왕의 면전에 대고 나라가 망한다고 말했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는가.
잠자코 있던 의자왕이 호통을 쳤다.
네가 바로 유언비어를 퍼뜨린 놈이로구나. 너는 신라의 간자가 분명하다. 여봐라, 저놈의 목을 베어 저자에 효수하고 죄상을 적은 방을 붙여라.”
무당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에 순순히 군사들에게 끌려갔다.
의자왕은 겉으로는 매우 화난 척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냉정하게 현실을 가늠하고 있었다. 무당이 민심을 돌릴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 셈이었다. 그가 간자로서 악의를 품고 백제에 해를 끼칠 풍문을 퍼뜨렸다고 죄를 뒤집어씌우면 조금이나마 백성의 동요를 무마할 수 있었다.
의자왕은 뒤에 서 있는 금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저 글귀의 뜻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금화는 잠시 눈을 들어 거북 등에 있는 구절을 자세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둥근달은 왕성함을, 초승달은 미약함을 나타냅니다. 그런즉 백제는 흥하고 신라는 망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과연 너의 예지가 신통하구나.”
의자왕은 크게 기뻐하며 금화를 추켜세웠다. 이처럼 무당을 벌하고 금화를 칭찬한 데는 백성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물줄기로 변한 민심의 이반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별궁의 후원은 내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후원에 자리한 궁남지는 화사한 연꽃들로 가득 차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얀 연꽃이 달빛을 머금는 밤이면 외로운 궁녀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처연한 아름다움이 발현되었다.
궁남지는 본디 무왕이 선화 왕후를 위해 만든 정원이었기에 외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국왕과 허락받은 몇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역이었다.
그런데 이 밤에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린 사이에 누군가가 궁남지에 나타났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비단 치맛자락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그가 여인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여인이 고요한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구름이 걷히면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졸지에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의자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금화였다. 달빛을 머금은 연꽃이 무색하리만치 그녀의 자태는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금화는 연신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때, 어딘가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왕실의 금지(禁地)입니다. 몰래 들어온 걸 들키기라도 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지금 궁정에서 가장 경계가 느슨한 곳이 바로 여기다.”
좌평 어르신, 더는 저를 찾지 마십시오. 오늘은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 나온 겁니다. 다시 연통하신다면 모든 사실을 폐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에서 나온 사내가 금화에게 다가섰다. 그는 의자왕의 수족이라 불리는 내신좌평 임자였다.
그리되면 네 목숨 또한 무사치 못할 텐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금화는 임자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십시오. 그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는 밑창이 뚫린 배와 같다. 곧 침몰할 텐데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으냐. 쥐새끼조차도 스스로 살길을 찾는데 사람이야 더 말해 뭐 하겠느냐.”
임자의 결심은 확고했다.
금화는 더는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절대 자신을 놓아 줄 리 없었다. 차라리 칼을 물고 죽을지언정 김유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평생 짊어졌던 마음의 굴레를 벗어던질 기회를 어찌 마다할 수 있었겠는가.
 
금화는 신라에서 무녀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가끔 어둠이 내릴 무렵 신당으로 찾아오던 지체 높은 사내를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철이 들면서 그가 자신의 생부가 아니라 마을의 주인이자, 어머니의 정부일 뿐이란 걸 알았다. 그때 느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살았다.
나이가 차면서 금화는 박꽃처럼 피어났다. 그녀의 청초하면서도 농밀한 아름다움이 심연의 침묵과 어우러지면서 신비감을 더했다. 인근에 사는 사내라면 지체 높은 귀족부터 평범한 농투성이까지 빠짐없이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그들은 먼발치에서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겠다고 신당 주변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금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금화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어머니가 임종하던 때였다.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열여덟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어미는 숨을 거두기 전 딸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무녀의 딸은 무녀가 되는 게 팔자다. 그러나 너만은 어미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 촌주께 청을 해 두었으니 좋은 배필을 만나 여염집 여자처럼 평범하게 살아라.”
, 무녀로 살겠습니다.”
실로 5년 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 금화의 어미는 혼절(昏絶)했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가슴속 한을 풀지 못한 채 영원히 떠난 것이다.
금화는 어미의 대를 이어 무녀가 됐다. 마을에서 제사가 벌어지는 날이면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입고 현란한 몸짓으로 도무(蹈舞)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군 김유신의 명을 받은 귀당(貴幢)의 군사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대장군께서 그대를 데리고 오라 하셨소.”
명을 전하는 군관의 태도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귀당이라면 화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장군의 직속 부대로 부대원 모두가 스스로 당대 최고의 무사들이라 자부했다. 그런데 신출내기 무녀에게 이처럼 예를 차리는 걸 봐서는 윗선에서 특별한 당부가 있었을 것이다.
금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군사들은 미리 준비해 온 수레에 그녀를 태웠다.
 
해가 질 무렵, 금화 일행은 금성에 도착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곧고 넓은 대로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 있었다. 거리는 바삐 발길을 옮기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대로를 따라 오른편에는 월성의 성벽이 견고하게 둘러쳐졌고, 왼편에는 관청이 줄지어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동궁을 끼고 사잇길로 접어든 일행은 높은 담 너머에서 아름다운 풍경 소리가 들리는 집 앞에 이르렀다. 웅장하고 세련된 건축과 장식이 조화를 이룬 저택이었다. 집주인의 수준 높은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택 주위에는 많은 군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치 군진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태세였다.
금화 일행이 대문 앞에 이르자 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군관의 얼굴을 알아보고 군례를 올렸다.
대장군께 금화를 데려왔다고 알려라.”
군사 하나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금화는 군관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지나자 넓은 후원이 나타났다. 곳곳에 자리한 기화요초가 저마다 독특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별채 앞에 이르자 군관이 안에 대고 아뢰었다.
대장군, 금화를 대령했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라.”
군관이 눈짓을 보내자 금화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물어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을 받은 유신은 이미 초로에 접어들었지만 눈빛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활기가 넘쳐 보였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면서 쌓은 위엄과 경륜이 주위를 압도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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