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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 시대’라 불리는 1920년대 미국 뉴욕의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상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제이 개츠비는 밤마다 해변에 서서 건너편 선착장에서 가느다랗게 떨리는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불빛은 그가 평생을 바쳐 갈구했던 연인 ‘데이지’이자, 가난했던 과거를 지우고 도달하고 싶었던 상류 사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였고,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끈 비극의 서막이었다. 2025년의 끝자락,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서울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도심 곳곳에서 번쩍이는 신축 아파트의 경관 조명이 마치 개츠비의 초록 불빛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최근 부동산 시장을 지배하는 가장 서글픈 키워드는 단연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이다. 경기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고금리의 한파가 여전한데도 서울의 신축 대단지 아파트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광기에 가깝다. 낡은 것은 도태되고 새것만이 가치를 증명받는 이 비정한 도심의 생태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저마다 더 높고 더 견고한 ‘신축의 성’을 쌓아 올리는 데 모든 생을 걸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본지의 <리더가 사는 곳> 기획 취재를 통해 엿본 성북동의 고요한 저택들, 한남동과 이태원의 삼엄한 담벼락, 그리고 강남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초고층 펜트하우스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바로 개츠비의 초록 불빛이다. 재계의 거물들이 점유한 그 공간들은 단순히 ‘사는 곳(Home)’을 넘어 권력과 부의 결정체이자, 범접할 수 없는 사회적 위계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높은 담벼락은 외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물리적 장벽인 동시에,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무언의 선언이기도 하다. 성벽 너머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은 이들에게 그곳은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아픈 신기루와 같다.
문제는 이 초록 불빛이 발산하는 강렬한 유혹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온기를 앗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얼죽신’ 열풍 이면에는 새 아파트에 입성하지 못하면 사회적 낙오자가 될 것 같은 집단적 불안감이 깔려 있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지위 불안’이 대한민국에서는 ‘부동산 불안’으로 치환된 셈이다.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 계급장이 되고, 거주하는 층수와 커뮤니티 시설의 화려함이 부의 척도가 되는 세상에서는 집이 더 이상 휴식과 안식의 공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타인의 부러움을 동력 삼아 굴러가는 거대한 전시관이자, 끊임없이 수익률을 증명해야 하는 차가운 투자 상품으로 전락했다.
올해는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지 꼭 100년 된 해다. 100년 전 개츠비가 가짜 신분을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 도달하려 했던 그 헛된 꿈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영끌’과 ‘상급지 갈아타기’라는 이름으로 변주되어 반복되고 있다. 개츠비는 결국 자신이 쫓던 불빛의 실체에 닿지 못한 채 고독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바라보던 불빛은 찬란했던 과거의 망령일 뿐, 결코 미래를 약속하는 등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맹목적으로 쫓는 신축 아파트의 화려한 LED 조명 역시 우리 삶의 진정한 밀도와 행복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빛이 밝아질수록, 그 빛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그림자는 더욱 짙고 어둡게 드리워질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성북동의 높은 담벼락 뒤에도 고독은 찾아오며, 강남의 최첨단 펜트하우스 대리석 바닥에서도 외로움의 한기가 스며든다는 점이다. 공간이 주는 화려함은 찰나의 만족을 줄 뿐,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온기이기 때문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잠시 뻗었던 손을 내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게 어떨까. 내가 열망하는 저 초록 불빛은 진정 나의 내일을 비추는 빛인가, 아니면 나의 오늘을 태워버릴 불꽃인가. 2026년의 새로운 문턱 앞에서, 이제는 ‘하우스(House)’가 아닌 ‘홈(Home)’의 의미를 복원해야 할 때다. 닿을 수 없는 신기루를 쫓느라 오늘 내가 누려야 할 소소한 평온을 얼려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초록 불빛은 멀리서 신비롭게 반짝일 때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 빛을 억지로 손에 쥐려 하기보다, 내 안에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등불 하나를 밝히는 연말이 되길 바란다. 내가 사는 곳이 곧 나 자신을 규정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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