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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엄마는 나의 축복②
노름꾼 아버지·고된 시집살이, 감내하신 어머니
딸에게 선생님이라 하는 엄마의 모습…오래오래 평안하시길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7-02 22:50:05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엄마는 19세에 첩첩산중인 경북 안동 개골이라는 산속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꽃가마 타고 와서 내리고 보니 앞도 산이요 뒤도 산이라 아주 작은 두메산골인 것이다. 2남 2녀의 맏딸인 엄마는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한 아주 예쁜 처녀로 박 씨 문중에서 사랑을 받고 잘 자란 선비의 딸로서 몹시 가난하고 못사는 농사꾼인 아버지께 시집을 온 것이다. 가마에서 내리고 보니 이제는 길도 몰라 도망도 갈 수 없는 산골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시고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무나 가난해 먹을 것이 없어 시어른 모시고 살아가는데 낮에는 더레기를 옆에 차고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물을 때로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어 쌀 등겨라는 것으로 버무려서 떡과 죽을 끓어서 먹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첫딸을 낳고 둘째 셋째 딸을 낳으니 할머니는 아버지를 새장가 보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구박하시는 것이다.
 
엄마를 가라고까지 했다고 하나 도망가는 것을 몰라 그럭저럭 살다 보니 넷째는 아들을 낳고 모두 8남매를 낳았던 것이다. 8남매를 낳아도 너무나 가난해 미역국 한번 못 잡수시고 몸조리 하루도 해본 적이 없이 출산하고는 바로 나와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내 동생 출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일하시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볏짚 한 단을 방안에 던지면서 여기에다 아기 낳으라고 하시면서 마당에서 볏짚 단을 방으로 휙 던지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일을 시킬 수밖에 없어 엄마는 나보고 작은 솥에 호박 넣고 물 붓고 소금 넣고 나무로 불을 지펴 국을 만들라고 하고선 아기를 낳으신 것이다. 엄마는 혼자서 애기 태를 끊으시고 혼자서 다 정리하시고는 조금 있다가 나와서 저녁밥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다.
 
난 그때도 철없이 모르기에 엄마는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서 울 엄마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 또 있을까 생각한다. 어쩌다 시골 장날 아버지가 고등어 한 손을 사오면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상에만 올린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생각하고 잡수지 않고 며느리에게 주면 엄마는 “아버님 드세요”하고는 드리면 결국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옆에 있던 내가 먹을 때도 있었다.
 
엄마는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풍부해 많은 이에 덕망이 높으며 엄마로부터 배운 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 당시에 시집 장가들면 사돈끼리 서신을 주고받는 사돈지라는 서식이 있는데 누구든지 혼사가 있으면 엄마가 먹을 갈아 붓글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그것도 엄마가 많이 하셨고 문중에 대소사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물어보곤 했다.
 
모든 면에 유식하던 엄마는 자식만큼은 배우게 하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하시며 심지어는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게 일하시면서 자신은 불태우신 분이다. 천리만리 먼 곳 도시로 보내어 공부하게 한 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여자 공부시켜서 무엇하느냐고 심지어는 그렇게 일하면 몸이 상해 일찍 죽는다며 별의별 욕을 다 들어가면서 8남매를 도시로 보내 배우도록 하셨다.
 
아들 셋, 딸 다섯을 위해 엄마의 인생 모두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그래도 아빠, 엄마는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므로 자랑뿐이고 기쁨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시며 장날에도 파단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아서 심지어는 온종일 굶주리면서 어떤 때는 배고프면 끈을 허리에 매고 다니다가 꽉 졸라매면서 배고픔을 이기곤 하시고 했던 부모님들이다.
 
새벽 어둑어둑해 길도 잘 보이지 않을 때 엄마 아빠는 꽁보리밥, 고추장, 된장, 물가지고 일터로 나가시면 땅이 보이지 않아 일 할 수 없을 정도는 집으로 들어와 엄마는 소죽을 끓이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는 부엌으로 가서 초롱불 켜놓고 저녁밥을 만들곤 했다. 산속에서 살기에 반찬은 늘 호박에 물 붓고 소금 넣으면 쉽게 국을 끓이는 것이다.
 
혹시 불을 땔 때 곡식 한 알이라도 있으면 줍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자부에게 어찌하든 알뜰히 살아서 잘살아라....부탁하고 돌아가셨기에 지금도 우리에게 밥 먹을 때 밥 한 알도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곡을 먹고 살면서 똑바로 살아야 하고 무엇이든지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남에게 해가 되면 안 된다고 교훈하실 때면 하시는 말씀이었다.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엄마는 식사하려고 할 때도 이웃분이 오면 엄마는 그분에게 밥을 주고는 엄마는 나중에 먹는다고 하고선 못 잡수 실 때가 많았다.
 
이런 삶 가운데 아버지는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노름하시고 며칠 동안 집에도 안 들어오시고 노름을 하시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이 잃어버리는 것을 도로 찾고자 몽땅 잃고선 노름빚 때문에 일 년 농사지은 콩이고 보리고 모두 가지고 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엄마는 수년 동안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아버지를 나무라도 곡식 가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남편이 저지른 일 다 가지고 가더라도 내년에 농사지을 씨앗은 남겨 놓고 가라고 애걸을 하는 것뿐이었다. 노름빚 받으러 가서 엄마처럼 하는 이 한 사람도 없다면서 미안해하면서도 노름빚은 인정사정도 없이 가지고 가버린다.
 
아무리 말려도 혈서를 쓰면서까지 노름판에 다니시는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마음 좋은 아버지는 이용당하면서 끌려가시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남편과 살면서도 아무리 아파도 약 한 번 산 적 없고 심지어는 넘어져서 팔목이 골절돼 아파도 병원에 가시지 않고 그 팔을 끈으로 묶어가지고 살림 살며 농사일을 하셨다.
 
그래도 자녀들은 아무도 몰랐고 아버지가 구루마에 치어 다리뼈가 부러져도 말없이 두 분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 오직 자녀들을 위해 이토록 하셨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은 알지 못했으니 나중에 손목뼈가 튀어나와 물어본 즉 얘기를 하셔서 알았다. 두 분 모두 일로 인해 육신은 만신창이 되도록 삶을 사신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고 살아가는 현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은 유난히 창가의 햇살이 침상을 환하게 비쳐온다, 습관처럼 어머니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나는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니 두 눈에는 눈물만이 나를 붙잡는구나. 딸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하는 엄마의 모습, 자녀들도 몰라보는 엄마의 모습, 좀 더 편히 사시기를 바라요. 받지 못한 사랑을 다 받으실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면서 평안하세요. 엄마가 자녀들에게 희생하신 인생을 딸이 엄마가 돼서 그 사랑 최선을 다할게요. 믿어주세요, 어머니!!!!!!! 사랑해요.
 
엄마의 삶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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