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10대 여학생이 숨진 가운데, 해당 가족이 이사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현장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24일 오후 스카이데일리가 찾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마자 탄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새벽 불이 났던 25동 앞은 이미 소방차와 인파가 빠져나간 뒤였지만, 검게 그을린 외벽과 깨진 창틀은 사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불은 오전 6시 18분쯤 14층 건물 8층에서 시작됐다. 집 안에는 40대 어머니와 두 딸이 있었지만, 큰딸 A양(17)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베란다 인근에서 발견됐고 끝내 숨졌다. 어머니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여동생은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출근으로 집을 비운 상태였다.
현장에서는 “너무 늦게 알았다”는 말이 반복됐다. 같은 동에 사는 한 주민은 기자를 만나 “처음에는 밖에서 싸움이 난 줄 알았다”며 “누가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상황을 알았고, 창밖을 보니 연기가 가득했다”고 말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 가족이 막 이사 온 상태였다는 것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A양 가족은 불과 며칠 전 이곳으로 이사했다. 한 유가족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이 스스로 의대를 목표로 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다”며 “학업 때문에 이사 온 지 5일밖에 안 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재가 시작된 세대 위로는 검은 그을음이 수직으로 번져 있었다. 불길은 외벽을 타고 올라가며 14층까지 흔적을 남겼고, 유리창은 녹아내리듯 깨져 있었다. 불이 난 집뿐 아니라 위층과 인접 세대까지 피해가 번진 흔적이었다.
현장을 둘러보면, 이번 사고가 단순한 ‘한 세대의 비극’으로 끝나기 어렵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은마아파트는 1979년 준공된 47년 된 아파트다.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다. 당시에는 의무 대상이 아니었고, 이후 기준이 강화됐지만 기존 건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초기 진화를 도와줄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불은 빠르게 번질 수밖에 없었다.
단지 구조 역시 대응을 어렵게 했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구조 탓에 단지 곳곳은 차량으로 빼곡했다. 이중·삼중으로 겹쳐 선 차량 사이를 비집고 소방차가 진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불은 순식간인데, 들어오는 길이 막혀 있으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민은 “경보가 제대로 울렸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새벽이라 못 들은 건지, 아니면 아예 작동하지 않은 건지 지금도 헷갈린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에서 ‘안전’은 공용이라기보다 각자의 몫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수천만 원을 들여 내부를 전면 수리했고, 누군가는 그대로 살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겉으로는 새 집 같아 보여도, 안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화재는 한 가정의 비극으로 시작됐지만, 노후 아파트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냈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구조, 훈련되지 않은 대피 체계, 좁은 진입로,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이다. 불은 꺼졌지만, 질문은 남았다. 왜 이 위험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가.
“스프링클러 없었다”… 노후 단지의 ‘규정 밖’ 안전
현장에서 가장 먼저 거론된 단어는 ‘스프링클러’였다. 은마아파트는 1979년 준공으로, 당시 기준상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었다. “초기 진화 장치가 사실상 없었다”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서 반복됐다. 노후 단지의 안전이 ‘현재 기준’이 아닌 ‘당시 기준’에 묶여 있는 셈이다.
단지 내 만성적인 주차난도 ‘골든타임’을 갉아먹는 구조적 위험으로 지목됐다. 이중·삼중 주차된 차량들은 소방차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부 주민들은 “경보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평소 오작동이 잦아 실제 화재 상황을 늦게 인지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주민 진술에 기반한 주장으로, 정확한 작동 여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화재 현장 주변에서도 ‘노후의 신호’는 곳곳에서 확인됐다. 복도 천장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콘크리트가 떨어져 있었으며, 외벽 주변에는 전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계단실 벽면 균열과 임시 보온재는 건물의 노후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주민들이 “전선 상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눈으로 확인되는 장면이었다.
“관리엔 문제 없다” vs “훈련은 없다”
같은 현장을 두고도 인식은 엇갈렸다. 현장에서 만난 안전관리 인력들은 관리 체계를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외부 업체가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으며 소방시설도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안전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관리 측면에서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반면 주민들의 체감은 달랐다. “소화기나 소화전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대피훈련은 거의 없다”, “방송도 상황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한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관리되고 있다’는 시스템과 ‘안전하다고 느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겉모습만 봐도 세대별 ‘안전 투자’가 갈린다”고 말했다. 그는 “하얀 샤시로 바뀐 세대는 대부분 올수리를 한 집들로, 내부는 뼈대만 남기고 전면 리모델링을 하면서 배선과 수도관도 함께 교체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겉으로 깔끔해 보여도 그것이 곧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실제 전선 상태는 일반 주민이 알 수 없고, 낡은 아파트는 결국 비슷하다”고 했다. 이어 “주민들을 모아놓고 진행하는 대피훈련은 거의 없고, 실제로 그런 훈련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가 반복해 강조한 것은 ‘개인 부담’이었다. 재건축이 늦어질수록 주민은 이사도 어렵고, 고치자니 비용은 커진다. “한 번 수리하면 7000만~8000만 원씩 든다. 4000 세대 중 절반만 그렇게 해도 전체 비용이 막대하다. 결국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20년 표류의 이유… 규제·갈등·인프라·비용
은마아파트 재건축이 장기간 지연된 이유는 복합적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논의가 시작됐지만, 규제와 사업성, 내부 갈등, 외부 인프라 문제가 겹치며 속도를 내지 못했다.
서울시의 층수 규제는 대표적 변수였다. ‘35층 제한’ 기조 속에서 고층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됐고, 이에 따른 사업성 논쟁도 이어졌다. 여기에 대규모 단지 특유의 이해관계 충돌이 누적되면서 조합 내부 갈등도 상시화됐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조합장이 계속 바뀌면서 사업이 일관성을 갖기 어려웠다”며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방향이 흔들리고, 그때마다 절차가 지연되는 구조가 반복됐다”고 말했다. 이어 “조합 내부 갈등이 정리되지 않으면 외부 변수보다 더 큰 리스크로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외부 인프라도 변수였다. GTX-C 노선이 단지 지하를 관통하는 설계를 두고 안전성과 소음 문제를 둘러싼 반발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행정 절차와 사업 일정이 지연됐다. 최근에는 사업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시는 은마아파트를 ‘신속통합기획 2.0’ 첫 적용 사례로 선정하고 최고 49층, 5893세대 규모 재건축 계획을 확정했다.
그럼에도 공사비 상승과 이에 따른 조합원 분담금 증가는 또 다른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추가 분담금은 특히 고령 조합원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재건축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70대 조합원 A씨는 “여기서 30년 넘게 살았는데 큰 문제 없이 지내왔다”며 “사는데 지장도 없는데 재건축 때문에 괜히 시끄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사비니 분담금이니 계속 부담만 늘어나고, 나이 들어서 그걸 감당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그냥 지금처럼 놔두는 게 낫다. 괜히 건드려서 더 불편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곧 이주할 것”이라는 기대가 만든 또 다른 위험
현장에서 만난 주민은 ‘지연의 역설’도 언급했다. “곧 이주할 거라는 기대 때문에 오히려 보수를 미루게 된다”며 “1~2년 안에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큰돈을 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재건축은 안전을 해결할 ‘미래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길어질수록 현재의 관리와 대비는 느슨해진다. 그는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재건축이 빨리 진행돼야 한다”면서도 “그 사이의 위험을 누가 책임지느냐”고 반문했다.
은마아파트는 ‘49층, 5893세대’라는 미래 청사진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재를 규정하는 숫자는 따로 있다. 47년이라는 시간, 스프링클러 없는 구조, 그리고 재건축 지연 속에서 각 세대가 떠안은 수천만 원대 수리비다.
불은 꺼졌다. 그러나 재건축이 완료되기 전까지, 노후의 비용과 위험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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