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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낮에도 보이는 달①
어떤 작품과 비길 수 없는, 가슴 속 부모님 모습
추억, 비화, 존경 등 나만의 아버지…작고하신 당신의 빈자리 하염없이 슬퍼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7-09 21: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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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갈 때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꼽는다면 단연 부모님이 아닐까.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노래나 문학작품도 많이 있지만, 개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그 어떤 작품으로도 비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이간직한 아름다운 추억, 비화, 존경의 마음 등등... 나도 나의 부모님 중 이제는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해 간직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나는 2남 4녀 중 넷째다. 내 위로 언니가 한 명, 오빠가 두 명이다. 내가 태어나던 5월의 초입에는 바람은 산들산들, 햇살은 뽀송뽀송해 밤새 진통 중인 어머니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아버지는 집에서 빤히 보이는 강가로 낚시를 가셨다고 한다.
 
아기가 곧 태어난다고 오빠와 언니가 돌주먹을 쥐고 달려가 소리쳤을 때 낚시를 하던 아버지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셨고 대문가에 도착하자 외할머니가 ‘딸이구먼.’ 한마디 하시자 낚시 바구니를 발길질해 담 너머로 던져 버렸다. 나는 졸지에 생선 바구니를 담 너머로 발길질할 만큼 서운한 자식이 돼버렸고, 그 일을 빌미로 용돈을 드릴 때나, 선물을 드릴 때, 여행을 모시고 갈 때 두고두고 아버지께 이 일을 들먹이며 서운해 했다.
 
“아버지, 생선 바구니도 던져 버렸는데 나는 속도 없이 용돈을 드리네...”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미안해하셨다.
 
“아녀, 애기가 나왔는데 비린 것을 집안에 가지고 오면 되냐? 그래서 바구니를 던진 것이지”
 
그래도 외할머니의 얘기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씩씩거리며 부아가 치민 얼굴로 찬물에다 얼굴이며 손을 벅벅 씻으면서 ‘아들이나 나오지’ 라고 투덜대셨다는데...
 
위로 오빠가 둘이나 되는데도 또 아들을 원했던 욕심 많은 아버지? ‘많은 아들은 나의 미래야’ 하고 자랑하고 싶었던 보수적인 사나이? 하지만 내가 태어나던 50년대에는 아들 많은 것이 자랑이었던 시대가 아닌가?
 
아버지는 유머 감각도 뛰어나셨다. 중학교 때 일주일의 수영체험활동을 하고 돌아온 날 현관에 들어서자 “아니, 우리 딸은 어디 가고 하얀 이빨만 돌아왔누?” 하셔서 나를 울게 했다.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까만 나는 어린 시절 까만 피부 때문에 열등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를 놀릴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것이 하염없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
 
‘맑고도 맑은 가을 하늘 낮에도 달이 보이네.’
 
이 시는 아버지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지은 글로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읊어주며 칭찬한 글이다. 투명한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어린 소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맑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을까? 아버지는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운동도 잘하는 아주 총명한 아이였다.
 
큰아버지가 태어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십 리나 떨어진 곡성 태안사로 하루도 빠짐없이 100일 동안 다니며 기도해 얻은 아들이 우리 아버지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지는 얼굴도 잘생기고, 기골도 튼튼하고, 운동신경도 발달한,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망을 지닌 참으로 본받을 만한 바른생활 사나이였다.
 
아버지는 집에서 십 리나 떨어진 국민학교를 결석 한번 없이 다녔다. 1920년대 시골 학교는 제 나이에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제 나이에 취학한 어린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며 키가 작았지만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소를 키우고 꼴을 베러 다녔던 아버지의 손에는 책이 항상 들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상모(아버지의 아명) 손에 책이 있나 없나 내기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그때는 일제 강점기여서 일본인이 교장이었고, 일본인 교장은 한국 학생들을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총각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을 쫓아내자는 모의를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반장이므로 당연히 앞장서야 한다는 덩치 큰 총각 학생들에 떠밀려(?) 일본인 교장 물러가라며 데모를 했고, 그 일로 학생부에 붉은 줄이 그어졌단다. 사상이 불온한 학생이라고.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 시험을 치렀는데, 매시간 시험이 끝나면 감독관이 와서 아버지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목마다 최고점수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시험이 끝나는 시간마다 점수를 매긴 모양이었다.)
 
합격자 발표 날, 명단에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교무실에 확인한 아버지는, 학생부에 적힌 붉은 줄 때문에 1등이었으나 합격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알고, 순천에서 월등까지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왔다고 한다. (지금도 차로 가도 1시간 가까운 거리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스팔트도 아니고 길도 잘 닦여지지 않았으리라.) 어린 소년의 실망과 절망을 어떻게 표현하랴?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집안일을 도왔고, 군청에 다니던 작은 할아버지가 돈을 써서 붉은 줄을 지워주던 17살에 철도국 시험에 합격했다. 더 배우고 싶었던 어린 소년의 상처는 그대로 자식에게 투영돼 공부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해서든 밀어줄 테니 공부만 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학교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 때문일까? 우리 형제들의 개근상을 다 합치면 아마도 기네스에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우리가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파도 학교에 가서 쓰러지라고 말씀하시면서 학교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다닐 때 큰오빠가 결혼하던 토요일 하루 수업을 빼먹은 것(그때는 토요일에도 수업했음) 외에 초, 중, 고를 모두 개근했다. 나머지 형제들도 다른 상은 몰라도 모두 개근상만은 탔노라고 자랑할 수 있다.
 
아버지 자신이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었던 과거로 인해 언제나 배울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라는 말씀과 학교, 학교, 공부, 공부를 잊지 않고 살아야 했다. 또 우리 형제들은 명절이나 기쁜 날에도 화투를 만져 본 적이 없다. 나는 삼봉이나 고스톱을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살면서 3가지만 지켜달라고. 첫째, 도둑질하지 마라. 둘째, 노름하지 마라. 셋째, 바람피우지 마라.
 
산과 들에서 풀을 먹이며 힘들게 송아지를 키워놓으면 할아버지는 장에 가져가 노름과 술에 날리셨고, 고개 넘어 숨겨둔 여자는 할머니의 눈물주머니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노름과 바람기를 보며 나는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맹세하셨으리라. 그래서 우리 형제는 좋은 날에도, 슬픈 날에도 화투를 챙겨 즐긴 적이 없다. 나는 봄날에 피어나는 튤립을 보면 늘 아버지를 떠올린다.
 
내가 자라던 60년대에는 튤립이라는 화초를 구경하기도 키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한 알뿌리를 구해 마당에 비닐을 씌워가며 곱게 꽃을 피우고, 겨울이면 방안에 고이 보관해 다음번 봄날을 기다려 다시 심곤 하셨다. 그래서 내게 튤립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한 기사의 갑옷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의 감성, 나비 날개처럼 부드러운 꽃잎이 주는 화려한 색감, 봄날의 나른하고 달콤한 낮잠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 집 마당에는 튤립뿐만 아니라 배추며 상추도 키웠지만, 앵두, 포도, 대추, 사과나무, 무화과 그리고 연못에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집이 커다란 저택인 줄 알겠지만, 우리 집은 철도국에서 직급에 따라 배당해준 20여 평의 관사에 마당은 백 평 정도 되는 일본식 집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마당을 가진 집들이 흔했지만,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집이니까 마당은 넓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는 그네도 있었다. 이제 생각하면 참 감성이 풍부한 낭만적인 아버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는 장조림을 드시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나는, 평소에는 고기가 없으면 수저도 드시지 않으면서 왜 장조림은 드시지 않는지? 알레르기가 있으시나? 하면서도 상 위에 올려진 장조림을 자식들 쪽으로 밀어주시면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저 우리에게 더 먹으라고 밀어주시나 보다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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