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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부패 기관 장악력을 늘리려다 국내외 반발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곳곳에선 23일(현지시간) 이틀째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최대 후원자인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 EU 가입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나섰다. 전날 젤렌스키는 검찰총장이 독립 기관인 국가반부패국(NABU)과 기소 전담인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에 더욱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법안에 서명했다. 앞서 내무부 소속 안보 당국이 NABU를 약 70차례 수색하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 직원 1명을 러시아 간첩 혐의로 체포한 상태였다.
젤렌스키 정부는 전시에 안보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여론은 정부 고위급의 부패 혐의에 적극적 수사를 막기 위해 고삐를 죄는 것으로 의심한다. NABU와 SAPO란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정부패에 반발해 일어난 유로마이단 이후 시민사회와 국제사회 압박으로 만들어진 반부패 기관이었기에 상징성이 크다. 부패 척결을 향한 국민적 염원을 담은 곳이지만 우크라이나 반부패 지수는 여전히 최하위권이다(180개국 중 105위). 소련 해체와 독립 당시 혼란 속에 생겨난 과두 재벌(올리가르히)를 제어하지 못한 후과로서 자주 지적된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HUR)의 23일자 성명에선 러시아가 이번 사태의 여론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국제적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지 주재 주요 7개국(G7) 대사들이 21일 NABU 수사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으며, EU는 반부패 기관 감독 법안의 의회 통과 전후로 거듭 경고음을 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23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에서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EU 대변인은 “법치주의 존중과 부패와의 싸움이 EU의 핵심 요소”라며 “가입 후보국으로서 우크라이나에 이런 기준 충족을 기대한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젤렌스키가 법치주의 유지와 반부패 노력을 충분히 보이지 않으면 EU 가입과 더불어 국제 공여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음을 블룸버그통신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의 신임 총리 율리아 스비리덴코가 인터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재정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지만, 현재 불리한 조건이 늘어난 셈이다. ‘법치주의’는 EU·IMF 등 국제적 기구에서 자금 제공을 위해 심사할 때의 기본 기준이다.
이에 젤렌스키는 23일 이번 사태의 핵심인 NABU·SAPO·검찰청·보안국(SBU)·국가수사국(SBI)·내무부 수장들을 한자리에 모아 의견을 청취한 후 엑스(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사회가 국가 기관에 원하는 바를 보며 정의와 각 기관 기능을 보장” “2주 안에 공동행동계획이 마련될 것”을 약속한 내용이다. “우크라이나 강화” “기존 문제를 해결해 더 큰 정의 구현” “사회 이익을 진정으로 보호할 조치를 담을 것”을 강조했으며, 저녁 연설에선 “(반부패 기관의 독립성 보장을 위한) 새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다짐했으나 구체적 내용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여론이 수그러질지 미지수다. 반부패 기관 단속으로 이번 사태가 확산하긴 했으나, 그동안 전시 혼란기를 틈 타 정권의 권력 집중 속에서 유로마이단 이후 국민이 10년 넘게 바라온 고위층 부정부패 근절이 이뤄지지 않아 분노가 쌓여 온 측면도 크다. NABU와 SAPO는 젤렌스키 면담 이후 낸 입장에서 정부의 움직임에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며 “의회가 없앤 (독립성) 보장을 복구하려면 모호한 부분 없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전쟁 발발 이후 처음 벌어진 이번 반정부 시위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다” “부패는 죽음” 등이 적힌 팻말들을 볼 수 있다. AFP·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수도 키이우에서 수천 명이 반부패 기관 감독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어갔으며 르비우·하르키우·오데사 등지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엔 10∼20대 청년층도 다수 참여했다. 키이우포스트는 시위 참가자가 점점 늘어 전날의 약 3배인 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면서 유로마이단 이후 최대 규모임을 짚었다.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고 쓴 문구와 젤렌스키가 머리에 뿔을 단 채 귀를 막은 모습 그림이 곁들어진 팻말도 눈길을 끌었다.
키이우 인디펜던트에선 러시아와 전투 중인 장병들 또한 이번 사태에 분노와 허탈감을 표시한다고 보도했다. ‘설계자’라는 콜사인의 한 23세 드론 조종사의 경우 “현 정부가 2019년 (집권) 이후 진짜 얼굴을 이번에 드러낸 것 같다”며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집중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토로했다. 전쟁 통에 정부를 감시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국가방위군 지휘관인 페트로 쿠지크는 이번 일을 “당국의 치명적 실수”라면서 “정부 고위급이 얽힌 다수의 부패 스캔들이 있다. 국민에게서 훔친 자산을 합법화하려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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