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박정이의 군사이슈

미·중 경쟁시대 기로에 선 한국의 선택은

피로 맺어진 한·미 동맹을 글로벌 전략동맹으로 발전시켜야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10-14 09:34:19

 
▲ 박정이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예)육군대장.
6·25 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맹결성정책은 태평양 동맹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미·일 안전보장조약, 미·필 상호방위조약, 호주·뉴질랜드·미국 태평양 안전보장조약(ANZUS) 등이 맺어짐에 따라 태평양 동맹 결성을 장기적인 정책으로 판단하고 미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우선 추진하게 됐다. 1953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개시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으로 인한 국민의 어려움과 우려를 덜기 위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국군 증강을 요구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이 휴전협상에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유엔을 통한 집단안보의 원리가 한국방어에 유리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휴전협상이 거의 합의단계에 이르렀던 1953년 5월까지도 한국과 동맹관계의 구축이나 단독으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책임을 떠맡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운동을 적극 전개하면서 미국이 요구하는 정전수용과 우리가 원하는 상호방위조약을 교환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은 한국민에게 사형선고’와 같다고 언명하면서 공산군의 침략을 억제하고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전력을 증강해줄 것도 줄기차게 미국에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휴전 전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보장하지 않자 1953년 6월 18일 압력조치의 일환으로 2만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휴전 이전에 한국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1953년 6월 25일 미 대통령 특사로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에 급파해 협상을 통해 8월 8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및 한국군 증강 문제 등에 합의하고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한국과 미국의 어느 당사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무력 공격을 받아 독립과 안전이 위협을 받을 경우 타 당사국은 그것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공동 대처하는 것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이승만 정부는 북진과 휴전체제 방해활동과 같은 독단행위를 포기하고 휴전을 받아들이면서 장차 있을지 모르는 공산 측의 무력침공을 사전에 억제하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편으로 미국의 단독개입을 확보했으며, 미국은 공산 측의 무력사용 의지를 사전에 봉쇄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한편, 1954년 7월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방침을 마무리 짓기 위해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의 합의의사록을 작성해 1954년 9월 27일 주한 미 대사 엘리스 브릭스(Ellis O. Briggs)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해 수차에 걸친 수정을 거쳐 11월 17일 정식으로 조인함으로써 한·미 양국은 회담 4개월 만에 한·미 합의의사록을 도출했다. 한국과 미국은 1954년 11월 17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비준하고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의 합의의사록’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지원은 제도적이며 계획적인 단계로 접어들게 됐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전쟁 방지를 위해 미국에 적극 요청했던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미군 주둔이라는 결과를 거뒀으며, 특히 그가 희망했던 미국과의 군사동맹관계를 맺게 됐다. 또한, 한·미 합의의사록에 의해 미국은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및 직접적 군사지원계획을 확대 시행하고 한국에 대한 예고하지 않은 침략에 대항해 증원군을 보낼 의사를 재확인했으며, 그 대신 한국은 군대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하에 두기로 합의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합의의사록의 도출로 인해 아이젠하워 정부는 휴전을 성립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정책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 팽창주의에 위협받고 있는 국가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의 생존이 걸린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아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억제하고 한국의 안보와 발전을 이룩하는데 큰 몫을 담당해왔는데, 이 조약은 지난 60여년 간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한·미 공동방위체제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하는데 기반이 됐다.
 
결국 6·25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온갖 악조건 하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기 위해 한·미 동맹결성정책을 성사시키고 국군의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킴으로써 안정된 가운데 산업화를 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으며, 향후 한반도에서 위기상황 발생 시 한·미 안보협력체제하에서 한·미 공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세계 역사상 글로벌 패권경쟁이 세 차례 진행됐는데, 1차 패권경쟁에서 조선은 중국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받아들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미·소 간 2차 패권경쟁에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됐고, 6·25 전쟁을 겪으며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된 뼈저린 아픔을 안았다. 21세기 동북아에서는 미·중간의 3차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 위협을 극복하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 국민국가를 완성해 세계의 중심국가 ‘글로벌 코리아’로 발전하느냐, 아니면 북한의 핵 위협 하에 위장평화 속에서 분단국가로 계속 남아 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미·중 패권경쟁하에서 한·미 동맹과 관련해 한국이 갖고 있는 안보자율성의 딜레마를 살펴볼 때, 북한의 핵 및 중국의 군사대국화 위협으로 인해 한국은 미국의 안보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완전한 안보자율성의 확보는 어렵다.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미국과의 국가 핵심이익과 핵심가치를 공유하는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심화·발전시키고 안보자율성을 양보함으로써 미국의 적극적인 안보지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동맹이 지속적으로 유지·발전하기 위해서는 동맹 핵심가치에 대한 공유, 위협에 대한 인식, 제도적 장치와 국민들의 신뢰 등이 매우 중요하다. 한·미 동맹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중견국가로 전변한 대한민국은 한·미 동맹을 더욱 발전시켜 북한의 평화로운 비핵화를 견인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대응 및 연합방위태세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또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의 핵심 축(linchpin)으로서 21세기 새로운 안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전략동맹을 강화해 나가야 하겠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 좋아요
    2

  • 감동이에요
    0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삼성그룹의 여러 계열사에서 뛰어난 실적을 냈던 '최치훈' 전 삼성물산 이사회 의장이 사는 동네의 명사들
김기범
한국기업평가
이동해(동해)
슈퍼주니어
최치훈
삼성물산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미세먼지 (2021-12-01 15:00 기준)

  • 서울
  •  
(양호 : 38)
  • 부산
  •  
(최고 : 15)
  • 대구
  •  
(좋음 : 21)
  • 인천
  •  
(좋음 : 26)
  • 광주
  •  
(좋음 : 29)
  • 대전
  •  
(보통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