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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만든 101가지 물건’을 전시하고 있는 스미스소니언 역사박물관에는 미국 독립선언문, 닐 암스트롱 우주복 등과 함께 신기하게도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과 ‘스태그스립 와인셀러 카베르네 소비뇽 1973’ 와인이 전시되어 있다.
두 와인이 전시품으로 선정된 이유는 1976년 5월24일 프랑스에서 열린 프랑스 와인과 캘리포니아 와인의 시음행사 ‘파리의 심판’ 때문이다.
전 세계가 프랑스 와인에 열광했던 1970년대 당시 와인 신생국이었던 미국의 와인이 프랑스의 국가 대표급 와인을 이긴 사건으로 저명한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스트로 평가한 결과였기에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파리의 심판’의 시작은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의 아이디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운영하던 와인숍과 와인스쿨 '아카데미 뒤 뱅'을 홍보하기 위해 독립 200주년을 맞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신생 와이너리의 와인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이벤트로 기획한 시음 행사가 파리의 심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벤트를 기획하고 미국인 동료 패트리샤 갤러거와 함께 참여할 캘리포니아의 여러 와인을 찾아 시음했다. 하지만 3리터가 넘는 큰 병의 저가 와인이나 생산하는 줄 알았던 캘리포니아 와인이 생각보다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인을 시음한 끝에 레드와인 6종과 화이트와인 6종을 선정했다. 문제는 통관이었다. 당시 프랑스 세관에서는 한 사람당 와인 한 병만 통관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디어를 내어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를 이끄는 친구에게 와인 운반을 부탁해 32명의 단체여행객을 통해 기적적으로 35병의 와인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들이 기획한 시음회는 파리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각각 10종씩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순위를 결정하는 행사였다. 오전에는 화이트와인, 오후에는 레드와인 세션으로 시음을 진행했다. 시음 행사에 참가한 와인은 캘리포니아 와인이 6종, 프랑스 와인이 4종이었다.
심사위원으로는 9명의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심사위원은 로마네 콩티(DRC; Domaine de la Romanée-Conti)의 공동소유자 오베르드 빌렌, 보르도 그랑 크뤼 샤또들의 연합체인 UGC 사무총장 피에트 타리, 프랑스 최고의 와인 전문지 르뷔드 뱅 드 프랑스의 편집장 오데뜨 칸 등 당시 프랑스 와인계의 기라성 같은 유명인 전문가들과 행사 주관자인 스퍼리어와 갤러거도 이들과 함께 심사했다.
어떤 심사위원도 미국 와인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시음회에 선보인 미국의 신생 캘리포니아 와인 대부분이 테이블 와인 정도의 등급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프랑스 와인들은 화이트는 부르고뉴 생산자의 그랑 크뤼와 1등급이었고, 레드 와인도 보르도 그랑 크뤼 1, 2등급의 최고급 와인이었다.
하지만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는 놀라웠다. 오전 화이트와인 세션에서 여유롭게 옆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행되던 시음 결과, 미국 와인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이 총점 132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126.5점으로 2위를 차지한 프랑스 와인 '도멘 룰로 뫼르소 1등급 샴 1973’을 여유있게 따돌린 점수였다. 5등 안에는 다른 캘리포니아 와인이 2개나 더 포함되었다.
오전의 시음 결과에 당황한 심사위원들은 오후 레드와인 세션에서는 침묵 속에 테이스팅에만 집중했다. 오전의 오판은 해프닝에 불과했다고 여긴 심사위원들은 보르도스러운 와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시음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레드와인 시음 결과도 미국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카버네 소비뇽 1973’이 1위로 선정됐다. 2~4위를 차지한 와인은 프랑스의 ‘샤또 무똥 로칠드’, ‘샤또 몽로즈’, ‘샤또 오브리옹’이었다. 모든 심사위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르뷔 뒤 뱅 드 프랑스’지의 편집장 오데뜨 칸은 자신의 채점표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시음회의 모든 과정을 목격한 ‘타임’지의 파리 특파원 조지 테이버의 기사에 의해서다. 당시 이 행사에 초청받은 전문기자들은 결과가 뻔하다고 여겨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었다. 구경삼아 시음회에 왔던 그는 인생 최대의 특종을 낚으며 전 세계 와인계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을 ‘타임’지에 기사화했다.
뉴욕 타임즈는“1976년 파리 와인 시음은 캘리포니아 와인이 와인 생산과 명성 확대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발표했다. 이 대회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2008년 개봉한 ‘와인 미라클(Wine Miracle)’이다.
파리의 심판이 있고 30년이 지난 2006년에 파리의 심판을 기념하기 위해 역사적인 재대결이 있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은 적어도 30년은 숙성해야 제맛이 나는데 1976년 파리의 심판 때는 제대로 숙성도 되기 전에 와인을 시음해 미국 와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출품된 와인과 그 빈티지로 재대결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더 참담했다.
1등부터 5등을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차지한 것이다. 숙성되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던 프랑스 와인은 이번에도 코가 납작해지고 말았다. 나파밸리 와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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