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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헌의 스포츠 세상]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야구의 열정만큼 스스로에게도 엄격
암 투병 사실 알리지 않고 홀연히 떠나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27 06:31:00
타격의 달인이라고 불리던 장효조를 빼 놓으면 한국 프로 야구사를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KBO 리그 40주년을 맞아 프로야구 레전드 40’에 선정됐던 장효조다. 그라운드의 별이 아닌 하늘의 별이 된 지 벌써 12년이 흘렀다. 그가 20119월 타계한 뒤 영원히추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장효조 선수 영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장효조는 1982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출전하면서 남들보다 1년 늦게 프로 무대로 옮겼다. 한국은 잠실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숙적 일본을 꺾고 우승 트로피를 처음 안았다.
 
왼손잡이인 장효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초등 3학년 때 대구로 전학가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1973년 대구상고 2학년 때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끌며 스타가 되었고, 주요 대회 타격상을 휩쓸어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양대에 진학해서도 계속 빛을 발했다. 프로야구 출범 전인 1976년 실업과 대학야구의 최고봉인 백호기 대회에서는 타격왕이 되었다. 0.714라는 만화 스토리 같은 타율이었다.
 
키가 173cm에 불과한 장효조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대구중 시절에는 포지션에 밀려 왼손잡이인데도 2루수를 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타격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투수를 노려보다가 보내고 싶은 쪽으로 타구를 날려 보내는 부챗살 타법을 구사할 만큼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안타를 쳐 내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배트 한 자루 갖고 몇 달씩 쓸 정도였다. 정교하게 배트의 스위트 스폿에 맞추기 때문이었다.
 
프로 때는 라커 룸에서 속옷만 입고 4시간을 스윙 연습을 하는가 하면 배트 박스에 한 번 서면 100번을 쉬지 않고 스윙했다. 집에는 마치 무사(武士)처럼 수십 개의 배트를 걸어 놓고 정성껏 관리했다. 안타를 못 치는 날이면 밤 늦게까지 혼자서 타격연습에 집중했던 그다.
 
순발력과 파워가 좋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연습의 결과다근지구력이 생기면서 스윙 스피드는 번개 같아졌고, 100m를 11.3초에 끊을 정도로 발도 빨랐다.
 
장효조는 프로 10년간 통산 3050타수 1008안타로 타율 0.330을 기록했다키움 이정후가 통산타율 0.340으로 지난해부터 장효조를 앞섰지만 아직 은퇴가 멀었기에 과연 장효조의 기록을 넘어설지 주목된다장효조는 네 번의 타격왕(1983·1985~1987)과 한 번의 MVP(1987), 최다안타 1(1983), 출루율 1(1983~1987·1991), 골든글러브 5(1983~1987)를 각각 기록했으니 경이로운 성적이 아닐 수 없다.
 
▲ 1987년 프로야구 정규리그에서 MVP를 차지한 장효조가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 위에서 환호하고 있다. KBPO제공
 
프로선수로서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은 1988년이었다. 삼성 장효조가 롯데 김용철과 유니폼을 바꿔 입은 것은 큰 충격이었다. 팬들에게도 깜놀그 자체였다. 장효조는 충격을 추스르며 분전했지만 멘탈이 무너진 탓에 파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자 1992년 시즌을 끝으로 과감히 은퇴했다. 지고는 못 사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게다. 별다른 은퇴식 없이 초라하게 떠났다.
 
사실 그는 구단의 눈엣가시였다. 노조나 마찬가지인 프로야구선수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앞장서서 밉상이 되거나 구단과 연봉 협상에서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은퇴한 장효조는 롯데에서 6년간 타격코치 생활을 했다. 2000년 삼성의 타격 2군 코치로 복귀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었다. 팬들은 장효조가 고향팀 삼성에서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삼성은 그를 외면했다.
 
장효조는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삼성 스카우트가 되어 야구계에 복귀했다. 물론 삼성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는 자리는 아니었다. 2010년에야 삼성 2군 감독이 되어 후배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신인왕을 받은 배영섭을 비롯해 박석민·모상기 등이 모두 장효조의 지도를 받았다. 장효조는 2011'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어 7월 잠실야구장에서 감사 인사를 했다. 팬들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장효조는 완벽주의자였다. 속이 여리면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눈에서는 빛을 뿜었다.
 
전성기 때 너무 화려했지만 은퇴 후에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장효조였다. 내성적인 데다 지고는 못 배기는 외고집·직설적인 어투에 늘 긴장하며 자신을 채찍질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20117월 말 급격히 살이 빠져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간암과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병약한 모습 보이는 걸 유독 싫어한 장효조는 주변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지인들의 문병도 사절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55세였다. 하지만 전설의 타자가 가는 마지막 길은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삼성 선수단이 명복을 빌었고 코치 6명이 고인을 운구하는 마지막 길에는 수백 명이 운집했다.
 
장효조만이 가르져 줄 수 있는 타격 노하우를 후배 선수들이 전수받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의 타격 솜씨가 그리운 야구의 계절이다. 야구에 열정이 강했던 만큼 자기 스스로에게도 대단히 엄격했다.
 
야구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그는 말년에 신앙에 의지했다. 한때 자신을 전도하던 대구상고와 한양대 후배인 이만수 전 SK 와이번즈 감독의 뺨을 쳤던 장효조는 180도 변했고 아들을 목사로 키우기도 했다. 그가 늘나라에서 안식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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