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나 좀 구해 주시오.”
장손무기는 이세적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 덤불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위 뒤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이세적을 발견했다.
“살아 계셨구려! 나는 장군이 무사할 거라 믿었소.”
군사가 이세적을 부축해 말에 태웠다.
대총관은 목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자!”
장손무기의 명이 떨어지자 당군은 주위를 경계하며 계곡을 벗어났다. 고구려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큰 피해 없이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장손무기가 이세적을 구해서 돌아오자 태종은 눈물까지 흘리며 반겼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4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다. 태종이 친정한 전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참패였다.
당 태종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연개소문은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수백 마리의 소와 돼지를 잡은 큰 잔치였다. 모든 군사는 즐겁게 먹고 마시며 승리감을 되새겼다. 취기가 오를 무렵 대막리지는 도수금과 고정의를 가까이 불렀다. 다음 작전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도수금이 남은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대패했으니 저들도 당분간은 싸우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요동성을 쳐서 탈환하는 게 어떨까?”
대막리지의 물음에 군사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요동성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습니다. 보급로만 차단해도 저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데 굳이 우리 군사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지요.”
고정의도 머리를 끄덕였다.
“급한 것은 저들입니다. 남은 양곡으로는 두어 달도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더구나 온사문 장군이 등주에 있는 양곡 창고까지 불태웠으니 저들이 기댈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당군이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길목을 차단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연개소문은 흡족한 표정으로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럼 일단 유격대를 추가로 파견해서 당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주력합시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다 보면 저들의 군량이 바닥을 보일 테니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연정토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이 뛰어난 장수이기는 하지만 당군의 공세를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고정의가 대막리지를 대신해 대답했다.
“안시성은 천혜의 요새인 데다가 전쟁에 대비해 양곡과 병장기를 충분히 비축해 두었소이다. 성주 역시 지모와 용맹을 겸비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소.”
도수금이 연개소문에게 술을 따르면서 물었다.
“당군이 퇴각한다면 어떤 길로 갈 거라 보십니까?”
대막리지는 술잔을 받고 웃으며 말한다.
“결국 요택으로 갈 것이오.”
고정의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 확신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내 이미 신성과 현도성에 전령을 보내 통정진과 회원진을 장악하라는 명을 해 두었소. 남소성과 목저성의 군사들까지 합류할 테니 당군이 그쪽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거요. 만일 요행으로 둘 중 어느 한 곳을 통과한다 해도 아군과 말갈군이 요소요소 진을 치고 있소. 영악한 이세민이 이를 모를 리 없으니 결국 요택을 거쳐 달아날 것이오.”
고정의는 연개소문의 앞을 내다보는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당군이 후퇴하면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일대의 군사를 보내 뒤를 쫓되 주력군은 통정진을 지나 유성으로 달려가야 하오. 당군에 앞서 유성에 도착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집결시킨 후에 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이치면 되오.”
모든 장수가 연개소문의 지략에 감탄했다.
며칠 후, 연개소문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신성으로 나아갔다. 안시성을 지원하는 일은 고정의에게 일임했다.
등주가 초토화됐다는 보고를 받고 당 태종 이하 모든 장수는 잔뜩 침울해 있었다. 거듭되는 패배는 태종을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연일 총공세를 펼쳤지만 안시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정의의 군대가 압박을 가해 오는 상황에서 등주에 있는 양곡 창고마저 불타 버렸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당 태종은 한동안 궁리를 했지만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안시성만이라도 함락시키는 것이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당 태종은 장수들을 소집한 후에 입을 열었다.
“벌써 9월이다. 곧 겨울이 닥친다. 게다가 이제 식량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최선의 방책은 하루라도 빨리 안시성을 함락시키는 것이다. 다행히 그동안 진행해 온 토산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도종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토산을 완성해라. 장손무기는 군사들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 고구려군이 다시 토산을 파괴하려 할지도 모르니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대비하라.”
양홍례가 태종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군사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군 중에서는 예전에 유행했던 ‘쓸데없이 요동에 가서 죽지 말자’는 노래가 다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우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자 태종이 분기탱천하여 꾸짖었다.
“어찌 그런 간사한 말로 군사들의 사기를 꺾느냐!”
양홍례는 두려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병서에 이르길 승산이 없는 싸움은 시작하지 말라 했습니다. 게다가 장안을 떠나온 지가 너무 오래됐습니다. 국내의 일도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태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내 이놈을 죽이리라!”
당 태종이 칼을 뽑아들고 양홍례를 찌르려 하자 좌우의 장수들이 나서서 말렸다. 그는 마지못해 칼을 거두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태종은 잠시 후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리쳤다.
혼자 남은 태종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씹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양홍례의 말이 옳았다.
당 태종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토산 쌓는 현장으로 나갔다. 공사는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군사가 가마니를 지고 나아가 토산 뼈대 사이에 흙을 부었다. 어느새 안시성의 성벽과 얼추 비슷한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당 태종은 토산을 보니 위안이 됐다. 이것만 완성하면 그 위에 올라가 안시성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면 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는 토산의 높이를 여러 번 눈짐작으로 재면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당군의 토산이 점차 높아지는 것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지난번처럼 화공으로 토산 축조를 방해하려 했지만 하루가 멀다고 공격해 오는 당군을 맞아 싸우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9월 보름이 되자 토산이 거의 완성됐다. 당 태종은 이제는 됐다 싶었는지 총공격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연개소문의 깃발을 앞세운 고구려군이 당군의 본진을 공격해 왔다. 안시성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정의가 당군의 총진격을 예상하고 성을 돕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대막리지의 깃발을 내세운 이유는 당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함이었다.
태종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쥐죽은 듯 조용했던 고구려군이 하필 이때 쳐들어온 것이다. 당 태종은 모든 장수에게 즉각 맞서 싸우라는 명을 내렸다.
토산 공사를 감독하던 도종도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책임을 맡기고 태종을 도와 고구려군과 싸우러 나갔다. 그런데 그 사이 토산이 성곽 쪽으로 무너지면서 성벽 일부가 부서졌다. 예전에 고구려군의 화공으로 훼손된 기둥을 제대로 바꾸지 않았던 게 붕괴의 원인이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양만춘이 아니었다. 그는 휘하 군사들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타고 넘어와 당군이 만든 토산을 점령하고 방책을 세워 또 하나의 요새로 만들었다.
한편, 당 태종이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나가 보니 남쪽에 포진한 고구려군은 한나절이 지나도 진격해 오지 않았다. 태종은 우스운 놈들이라 생각했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는 고구려군을 감시할 병력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시 안시성 공격을 준비하도록 돌려보냈다.
저녁 무렵에야 영채로 돌아온 태종은 비로소 토산을 빼앗긴 사실을 보고받았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당 태종은 당장 도종을 불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나타난 도종은 부복애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태종은 부복애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자마자 다짜고짜 창을 던져 죽여 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태종은 이튿날 꼭두새벽부터 전군을 동원해 토산 탈환에 나섰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다 보니 난이도가 성벽을 공략하는 것 못지않았다.
당군이 힘겹게 토산의 중턱까지 오르자 고구려군이 위에서 통나무를 굴려댔다. 토산 위 점장대에 설치된 쇠뇌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수천의 당군이 통나무에 깔려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저승사자 같은 당 태종이 뒤에서 칼을 빼 들고 위협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진격하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렇듯 성과도 없이 군사들이 죽어 나가는 가운데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당 태종은 그제야 군사를 물렸다.
다음 날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태종은 마지막 희망이었던 토산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당군이 토산을 공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던 태종은 선두에 나와 군사들을 독려했다.
양만춘은 토산에 올랐다가 선두에서 군사들에게 외치고 있는 당 태종을 봤다. 그가 서 있는 곳까지는 충분히 화살이 미칠 수 있는 거리였다. 성주는 시립하고 있던 부관의 각궁을 빌려 그를 겨냥했다. 고함을 지르던 당 태종이 얼굴을 약간 돌렸다. 이 순간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몸을 흔들며 날아가더니 당 태종의 왼쪽 눈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방패로 가려 보호했다.
양만춘은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도적 이세민이 쓰러졌다! 당군을 향해 화살을 날려라!”
성안에 있던 군사들까지 모두 나와 화살을 쐈다. 곧이어 양만춘이 북을 쳐서 신호를 보냈다. 성에서 멀리 떨어져 주둔하고 있던 고정의도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당나라 영채를 급습했다.
태종의 얼굴이 피범벅인 걸 본 당군들은 그가 절명한 줄 알았다. 그래서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칠 궁리만 했다. 다행히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 여러 장수가 나서서 군사들을 진정시켰기에 간신히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정의의 군대는 닥치는 대로 당군을 찌르고 벴다.
이세적과 설인귀 등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웠다.
태종은 들것에 실려 가다가 정신을 차렸다. 왼쪽 눈에 아직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가 힘을 주어 화살을 빼니 눈알도 함께 딸려 나왔다. 통증이 극심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장손무기를 불렀다. 군사가 주군 옆으로 다가갔다.
당 태종이 탄식하며 말했다.
“양홍례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퇴각하도록 하라.”
장손무기는 태종의 명에 따라 당장 철군할 계획을 세웠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