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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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무사히 빠져나갈 수는 없다. 곧 대막라지께서 이끄는 대군이 당도할 테니 목숨을 건지고 싶거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서찰을 잡은 설만철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떨렸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배행방은 사자를 내보냈다.
당나라가 고구려에 패한 후 당나라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심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는 대총관도 예의는 아니었다. 평양성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연개소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설만철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설만철이 간신히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애당초 무모한 계획이었소. 당장 압록수 하구로 물러나 배를 타고 돌아갑시다.”
대총관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기에 부총관은 물을 권하며 진정시켰다.
“우리가 후퇴하면 고문의 군대가 쫓아올 겁니다. 그러니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일단 군사를 두 대로 나누어 장군께서 일대를 이끌고 강 하구로 물러나 떠날 준비를 하십시오. 제가 남은 일대를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우는 척하다가 기회를 보아 합류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설만철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부총관의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그날 밤 설만철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 강 하구로 내달렸다. 이러한 당군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박작성주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고문은 당나라 군사 중 일부가 강 쪽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역시 안지성주의 예상이 옳았구나.”
안지성주 연문동(淵文同)은 당군이 압록수 하구로 후퇴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문과 상의한 뒤 박작성에서 압록수 하구로 통하는 길목에 매복했다.
“날이 밝는 대로 남은 놈들을 요절내겠다!”
고문의 장담을 듣고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장수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고문은 당군의 영채를 들이쳤다. 성주의 신호와 동시에 고구려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당나라 군사들은 몸을 뒤틀며 쓰러졌다. 화살 공격으로 당군의 대오를 흩어 놓은 고문은 여세를 몰아 경기병을 투입했다.
당나라 장수 배행방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고구려 기병에 맞서려 했지만 고구려군의 기세에 사기가 꺾인 당군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일시에 대오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배행방도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고문은 당군이 등을 보이고 달아나자 남아 있던 보병까지 총동원하여 추격에 나섰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앞서 도망치던 당군이 주춤하면서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저 멀리서 안지성주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앞뒤로 포위된 당나라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문의 군사들은 더욱 기세가 올라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이제는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극이었다.
배행방과 몇몇 장수들은 요행히 포위를 뚫고 달아났지만, 대부분의 당나라 장졸들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싸움이 끝나고 고문이 군사를 수습하고 있을 때 연문동이 의기양양하게 다가왔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연문동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 예측했던 대로 당군이 우리가 매복하고 있던 곳에 나타났습니다. 비록 수장을 놓치기는 했지만 수많은 도적을 도륙했습니다.”
“참으로 장하시오. 앞으로는 우리 땅을 침범할 엄두도 내지 못할 거요.”
“이 모두가 장군의 뛰어난 지휘 덕분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공을 치하하고 있을 때 설만철은 간신히 압록수 하구에 이르러 배에 올랐다. 그의 뒤를 따라 온 군사는 고작 1000여 명에 불과했다.
대총관은 참담한 심정으로 뱃전에 서서 강변을 바라봤다. 이제는 고구려 땅만 봐도 신물이 났다.
한나절이 지나자 배행방이 처참한 몰골의 패잔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설만철은 부총관이 배에 오르자마자 다급히 출항을 명했다. 당선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내달려 먼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은 고구려 해군의 경계를 간신히 피해 내주로 돌아갔다.
청구도행군이 참패를 당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크게 노하여 두 장군을 참수하려 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대신들이 적극 말리는 통에 삭탈관직하고 멀리 유배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당 태종은 등창이 악화하여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고구려만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지금껏 선치(善治)를 해 왔다고 자부했다. 당대의 문인들을 중용해 문화를 부흥시키고, 산업을 진흥시켰을 뿐 아니라 수나라에서 자리 잡은 부병제를 보강하여 부국강병을 이뤘다. 또한 장수들을 동원해 말썽 많은 돌궐과 철륵, 그리고 토욕혼을 제압함으로써 천하의 나라들을 무릎 꿇게 했다. 이처럼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고구려 앞에 서기만 하면 더없이 초라해졌다. 그동안 나라의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탓에 수많은 장정이 죽임을 당했고 국고가 바닥났다. 이는 민심의 이반을 조장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군은 고구려군에게 연이어 대패했고 태종은 치유할 수 없는 심신의 상처를 입었다.
당태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후 등창이 악화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고구려 원정을 다시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치욕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어느 날 당태종은 승상 장손무기를 은밀히 불렀다.
승상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좌우를 물리치고 이야기를 꺼냈다.
“고구려가 문제요.”
장손무기가 의아하여 물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왜 하십니까?”
태종은 장손무기를 빤히 쳐다보더니 마침내 품고 있는 생각을 끄집어냈다.
“그간의 사초(史草)를 가져오라 하시오.”
사초는 당대(當代)의 사관을 제외한 누구도 볼 수 없었다. 황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권력을 이용해 사초에 압력을 행사한다면 사관이 소신껏 역사를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손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담당 사관에게 사람을 보냈다. 태종은 이미 자신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한 현무문 사건에 관해 쓴 사초를 뜯어고친 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의 사가들은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라고 해서 자국의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조작하거나 은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사관이 사초를 가져오자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내가 죽기 전에 우리가 고구려 원정에서 패한 기록을 없애 버리시오.”
오욕의 역사를 자기 죽음과 함께 영원히 지우려는 속셈이었다.
장손무기는 주군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당 태종의 처남이자 늘 옆에서 지켜봐 온 친구였고 그를 옥좌에 앉힌 신하였다.
승상은 태종의 지시에 따라 사초에 쓰인 고구려에 관련된 기록을 삭제하거나 왜곡했다. 이 때문에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쓰인 신·구당서는 사실과 다르게 기록됐다.
서력 649년, 당 태종은 고당 전쟁 때 얻은 병이 악화돼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태자 이치와 승상 장손무기 등 근신을 불러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숨을 거두었다.
태종이 죽고 나서 당나라 제3대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태종의 유조를 받들어 고구려 원정에 관련된 모든 일을 중지했다. 이로써 서북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해골에 고인 물
전쟁은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한다. 삼국 간의 전쟁이 자주 벌어지면서 신라 백성은 언제 외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어수선한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기댈 대상을 찾기 마련이었다.
이 무렵 금성 저잣거리에 승려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큰 소리로 괴이한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허락해 줄 것인가!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을 깎을 텐데!”
승려의 짙은 눈썹 아래 총기가 번뜩이는 눈은 재기를 보여 줬고, 우뚝 솟은 콧날 아래 정갈한 입술은 심지가 곧음을 말해 줬다. 흐트러진 승복은 틀에 박힌 세상을 조롱하는 듯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고, 노래에 맞춰 허공을 휘젓는 그의 몸짓은 새처럼 유연하고 자유로웠다. 근엄한 승려들과는 다른 그의 색다른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승려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노래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승려에 관한 소문이 도성 안에 자자하게 퍼져 대궐까지 다다랐다. 당시 신라는 무열왕(武烈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서력 654년,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재위 8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은 이가 바로 김춘추, 즉 무열왕이었다.
무열왕은 시위를 통해서 노래의 가사를 전해 들었다.
자루 없는 도끼에서 도끼는 여자를 말함이요. 자루는 남자를 뜻한다. 그러니 자기가 자루가 되어 도끼날에 들어가 하늘을 떠받치는 대들보를 깎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즉 훌륭한 규수를 만나면 나라에 보탬이 되는 동량(棟梁)을 생산하겠다는 노래였다. 무열왕은 초혼에 실패한 둘째 딸 요석공주를 떠올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무열왕은 시위를 보내 승려를 조용히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시위가 명을 받고 저자로 달려가 보니 승려 하나가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승려에게 다가가 국왕의 부름을 전했다. 승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위의 뒤를 따랐다.
왕궁에 도착한 승려는 편전으로 안내됐다. 안으로 들어서니 높은 옥좌에 무열왕이 앉아 있었다.
무열왕이 근엄하게 물었다.
“법명(法名)은 무엇인가?”
“소승은 원효(元曉)라 합니다.”
“정녕 도끼만 주어지면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을 깎아 만들 수 있는가?”
원효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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