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91] 결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삶에서 누리는 단 한 번의 평등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17 06:30:10
 
 
뒤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클랙슨이 길게 이어지고 창문을 내린 운전자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저속한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하운은 매장 앞에 차를 세우고 디지털마트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남자 직원이 허리 굽혀 하운을 맞았다. 그녀는 매장을 눈으로 훑었다. 냉장고와 세탁기를 지나 선명한 색상을 자랑하기 위해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있는 대형 LED TV 진열 코너로 곧장 걸어갔다. 리모컨을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직원이 제지하려 했지만 하운이 더 빨랐다.
 
뉴스 좀 틀어 주세요. 뉴스를 봐야 해요.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스를 틀라니깐!”
 
영문을 몰라 하던 직원이 리모컨을 찾아들고 채널을 바꿔 주었다. 몇 번 채널이 바뀌고 뉴스 보도국이 잡혔다.
 
오늘 오전 모스크바를 출발해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인 에어로스카이 A447편이 조금 전 사할린 공항 활주로에 비상착륙을 했습니다. 지면에 닿는 순간, 불이 붙으면서 비행기는 전소되었습니다. 비상 슬라이드를 통해 대피한 승객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고 원인과 탑승자 명단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남성 앵커가 사고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자료 화면이라는 글자가 상단에 뜬 사고 현장이 텔레비전에 비쳤다. 현지 장면이라는 건지 과거에 추락한 비행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붕이 사라진 동체,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 승객의 유품들이 뒹굴었다. 하운은 뒷걸음질치다  주저앉고 말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매장 직원이 내민 물 한 컵을 밀어내고 허정허정 매장을 걸어 나왔다. 독화살처럼 햇빛이 쏟아졌다.
 
공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하운은 결혼 후 한 번도 세상에 혼자 남겨질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직 젊었고 죽음은 너무나 멀었다.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결혼의 서약이 깨질 수 있을 거라는 의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꼭 사랑을 믿어서는 아니었다. 반드시 행복해서도 아니었다. 결혼했으므로 동우와 함께 늙어 가는 것만이 그녀가 아는 미래의 전부였다.
올림픽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앰뷸런스 사이렌이 들렸다. 멀리 경찰차와 견인차들도 보였다. 자동차 속도는 정체를 겪으며 차츰 느려졌다. 앞차와 거리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동차들은 사고 현장을 지나며 머뭇거렸다. 거친 손아귀가 힘껏 움켜쥐었다가 내던진 빈 깡통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흰색 승용차가 도로 위에 뒤집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했지만 스치는 순간 망막에 각인되어 버린 장면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던 남자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광포한 권력을 행사하는 죽음은 단 한 번, 모든 생명에게 균등하게 주어진다. 호흡이 끊어지고 혈액의 흐름이 멈춘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장기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지금 붙잡고 있는 꿈이, 기쁨이, 사랑과 슬픔과 미움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의식과 감각이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평등을 누리는 순간, 세상이 끝난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43
좋아요
12
감동이에요
4
화나요
0
슬퍼요
4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