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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96]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침입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와?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4 06:30:10
 
 
그녀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막다른 길, 회복 불가능한 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까지 자신을 내모는 중이었다. 그녀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애써 외면했던 통증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녀에게 없는 건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부재하는 건 남편 동우였다.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하운이 묻고 싶은 말을 동우가 먼저 했다. 트렁크와 면세점에서 산 위스키 백들이 현관 입구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집안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동우는 하운과 눈을 마주치는 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쳐다보았다.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다음부터는 비즈니스석을 타야겠어. 아무래도 이코노믹은 피곤해.”
 
출장을 다녀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동우가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우는 정결해지기 위해 몸을 씻고 있는 것일까. 하운은 꼭 닫힌 욕실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동우의 얼굴을, 동우의 눈과 입술을, 그리고 가슴과 허리를 훑었다. 그의 페니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동우가 엉거주춤,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서 방향을 틀어 몸을 가렸다. 마치 신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베어 물고 서 있는 아담처럼,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그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하운은 말없이 욕실 문을 닫았다. 동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타기로 한 적이 없는, 그러나 타고 있을 거라고 아내가 믿고 있던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아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동우는 집에 들어오면 텔레비전 리모컨부터 찾았다. 식사할 때도, 잡지를 뒤적일 때도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동우는 텔레비전을 끄지 않았다. 하운이 집에 들어왔을 때 집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리모컨은 그녀가 치워 놓은 자리에, 그러나 약간 비뚤어진 채 놓여 있었다.
 
하운은 장바구니를 밀쳐두고 동우의 트렁크를 열었다. 그동안 갈아입은 열세 벌의 속옷과 열세 켤레의 양말, 열세 벌의 셔츠, 빨랫감이 가득했다. 가구에 관한 홍보물도 몇 장 보였다. 면세점 백에는 장식장에 넣어 둘, 모양이 독특한 위스키 한 병과 시아버지 몫의 시바스 리갈, 늘 그랬듯이 시어머니와 그녀의 몫으로 샀을, 언제나 똑같은 브랜드의 영양 크림이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동우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무슈 카사노바의 오렌지색 넥타이가 상자에 들어 있었다.
 
사내자식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니깐.”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동우가 비웃던 유명 남자 연예인의 넥타이,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하운은 남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넥타이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빨랫감을 챙겨 세탁실에 던져 두어야 했지만 차마 동우의 속옷을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것들이 그녀의 집으로 침입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트렁크를 닫았다. 부정한 냄새가 스멀스멀 닫힌 트렁크 안에서 기어 나왔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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