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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21> 6일 전쟁 승리 안긴 ‘샴페인 스파이’ 볼프강 로츠
유동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8 06:31:20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1967년 6월5일 오전 7시45분,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 184대가 레이더망을 피해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의 11개 공군기지로 날아가 활주로에 있던 이집트 전투기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날 하루 동안 파괴된 이집트 공군기는 무려 300대에 달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시리아·요르단에 대해서도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선제 기습 공격으로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은 이들 3개국에 지상군을 투입시켜 파죽지세로 휩쓸어 가며 이집트 땅이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시리아의 골란고원·요르단 땅이던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역을 장악했다. 전쟁 개시 6일 만인 6월10일 전쟁이 종료되어 ‘6일 전쟁’ 또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2만700㎢에 불과하던 영토를 6만8600㎢로 3배가량 늘렸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스라엘 정보요원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활약상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카이로의 텔아비브 눈(The Eye of Tel Aviv in Cairo)’으로 불리는 볼프강 로츠(Wolfgang Lotz)다.
 
볼프강 로츠는 1921년 독일 만하임에서 연극 감독인 독일인 아버지와 배우였던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대교에 대한 신념이 약해 아들에게 할례(포경수술)도 시키지 않았다. 이는 후에 로츠가 이집트에 침투하여 스파이 활동을 할 때 그의 목숨을 지켜 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31년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933년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할 기미를 보이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도피해 텔아비브에 정착했다. 그는 제에브 그르 아예(Ze'ev Gur Arie)라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개명했다. 농업학교를 다니다 15세에 하가나(Haganah·유대인 비밀 군사조직)에 들어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징집되어 이집트에 주둔했던 정보부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독일어·아랍어·히브리어 등에 능통했기 때문에 주로 롬멜 장군 휘하의 독일 포로들에 대한 심문 작업에 종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로 돌아와 리브카(Rivka)라는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 볼프강 로츠는 이집트에 침투하기 위해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과 이집트 역사·정치·문화에 대한 학습을 마치고 철저한 신분 세탁을 거쳤다. 필자 제공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대위로 복무하며 아랍국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1956년 이집트와의 시나이 전쟁 때는 소령으로 진급해 보병여단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해 이스라엘 군정보국 아만(Aman)에 차출되어 스파이 활동에 투입된다. 
 
로츠는 이집트에 침투하기 위해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과 이집트 역사·정치·문화에 대한 학습을 마쳤다. 또한 신분 세탁을 위해 1959년 11월 독일로 갔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반유대주의자로 변신했다. 이스라엘 정보부는 로츠의 유대인 출생기록 등을 파기했고 2차 대전 당시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군단에서 헌신적으로 복무한 모범적인 독일군으로 복무기록을 조작했다. 이어 전쟁 후에는 호주로 이주해 11년간 말 농장을 경영한 사업가로 경력을 세탁했다. 로츠라는 스파이를 양성하는 데는 무려 4년이 소요되었다.
 
1960년 12월 로츠는 마침내 이집트에 침투한다. 그러고는 수도 카이로에 승마 클럽을 설립하기 위해 온 부유한 독일인 사업가로 행세한다. 카이로의 승마 클럽 중 이집트 육군 장교들이 후원하는 클럽을 드나들며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고, 카이로 외곽에 말 사육 농장과 승마 학교를 세웠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집트 상류층에 진출해 명망가들이 모이는 모든 파티에 드나들었다. 이를 통해 이집트 정부 고위 관료와 군사 엘리트들과 접촉하면서 각종 군사정보를 입수했다.
 
▲ 로츠가 스파이 활동을 하던 중 만난 두 번째 아내 발트라우트는 뛰어난 사교술로 로츠의 스파이 활동에 도움을 줬다. 필자 제공
1961년 파리 여행 중 동독 난민으로 미국에 거주하던 풍만한 체격의 금발 미녀 발트라우트(Waltraud)를 만나 2주 만에 결혼했다. 고향에 첫 번째 아내가 있었으니 이중 결혼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군정보국 ‘아만’은 우려했으나 그녀의 현란한 사교술은 도리어 로츠의 스파이 활동에 한몫을 했다.
 
로츠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고문 엘 샤페이·이집트 로켓 기지와 군사 공장의 보안 책임자인 오스만 장군·카이로 경찰서장 등과 교류하며 수에즈 운하 근처의 비밀 기지·미그(MIG) 전투기 기지·소련이 제공한 무기체계·이집트군의 전력·작전계획·병력 배치 현황·방어 역량·이집트를 위해 일하는 독일 로켓 과학자들의 목록 등을 입수했다. 그는 각종 호화 파티를 주최했고 이집트 친구들에게 사치스러운 선물 공세를 펼쳤다.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 지출이 뒤따랐다, 그러나 ‘고비용 지출’에 ‘초고효율의 정보’를 산출했고 아만은 환호했다. 그의 별명이 ‘샴페인 스파이’가 된 이유다. 1963년 로츠의 소속은 ‘모사드(Mossad·이스라엘 대외정보국)’로 바뀌었다.
 
로츠의 스파이 행각이 탄로 난 것은 무선 교신 때문이었다. 이집트 방첩 당국은 라디오 청취 시 엄청난 잡음과 방해 전파가 발생한다는 신고가 잇따르자 전파탐지 역량을 보유한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소련 군정보국(GRU) 소속 전파탐지팀의 추적으로 전파의 발신지가 로츠가 운영하는 말 사육 농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5년 2월 로츠 부부가 체포됐고 5년간의 스파이 활동은 막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집트 관계자와 군부는 발칵 뒤집혔다. 내 친구가 스파이였다니! 전 세계 언론도 경악했다.
 
▲ 1965년 2월 로츠 부부는 이집트 방첩당국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필자 제공
 
이집트 방첩 당국은 로츠가 이스라엘 스파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했지만 그는 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자신은 독일인이라고 버텼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할례를 하지 않았고 독일 내의 기록도 완벽하기 때문에 방첩 당국은 그를 독일정보부(BND) 소속의 스파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위한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1965년 8월 로츠는 무기징역형과 중노동형을. 부인 발트라우트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로츠가 이스라엘 스파이였다는 사실은 1967년 6일 전쟁 직후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포로(500명) 협상 시 포로교환 명단에 로츠와 그의 아내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1968년 로츠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평온한 삶을 살다가 1993년 심장병으로 72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생전에 ‘샴페인 스파이(The Champagne Spy)’(1972)란 자서전을 집필하여 자신의 활동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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