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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페인’(2024)은 제목 값을 톡톡히 하는 영화다. 온갖 고통의 선율이 그 안을 감돌고 있다. 데이비드와 벤지는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 조모를 둔 사촌 간이지만 서로 사뭇 다르다. 둘의 폴란드 역사 기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갖가지 아픔들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 아픔들의 관계를 섬세하게 체계화하면 ‘리얼 페인’에 깔리는 은은한 음악이 더 통절하게 다가오는 계기가 마련될 듯싶다. 이 영화에 서린 아픔은 ‘사고(史苦)’ 혹은 ‘사고(私苦)’로 양분된다 할 수 있다. 전자는 역사 속의 과거적 아픔과 그 아픔을 ‘지금 여기’에서 가상적으로 헤아려 보는 현재적 아픔, 후자는 혼자만의 개인적 아픔과 상호 간의 관계적 아픔으로 다시 각각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고(四苦)가 ‘리얼 페인’의 고통 시스템을 구성한다고 분석하는 관점도 마냥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유대 민족 학살의 어두운 역사가 인류사의 트라우마요, 유대인에게는 크나큰 참극이라는 점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쇼팽의 야상곡(nocturne·녹턴) 20번이 흐르는 공항 안이 영화의 첫 장면임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폴란드의 음악가 쇼팽이 작곡한 이 명곡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2003)에서도 연주된다. 영화 내외의 이런 맥락을 엮을 수 있다면 영화 곳곳에 깔린 클래식 곡들이 자못 묘하게 들릴 것이다.
공항이 다종다양한 콘텍스트들의 집결소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항은 상호 이질적인 국가 및 인종의 여행객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들에게 각인된 역사적 콘텍스트들도 공항 내에서 암암리에 교섭하기 마련이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의 고투가 서린 폴란드를 살펴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도 각양각색의 출신 배경을 지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려는 관심만은 공유한다. 그런 현대인들이 폴란드인들의 대항이 조형된 조각상 주위에서 과거에 벌어졌을 법한 전쟁과 투쟁을 모방하고 그 시뮬레이션 현장을 사진으로 찍은 후에 마치 영화 같다고 말하는 장면은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사진과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보존함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에게 그 과거의 시뮬레이션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매체이기 때문이리라.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개개인의 고통이 가려지는 일이 많았음을 떠올려 보면 캐릭터들이 느끼는 내밀한 아픔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데이비드와 벤지는 모두 정신건강의 면에서 각자의 어려움을 경험한 이력이 있다. 데이비드는 강박장애 치료를 위한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벤지는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게다가 데이비드에게는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어린 딸마저 있지 않은가.
성격도 꽤 상이하고 의상의 색깔까지 자주 대조되는 두 남자의 원증회고(怨憎會苦·싫은 사람과 함께하거나 싫은 환경을 견뎌야 하는 괴로움)가 잘 보여주듯이 자아의 아픔은 타인들 사이(inter)의 엇나가는 관계망(net)으로부터도 발생한다. 데이비드를 인터넷 광고 판매업자로 설정한 이 영화는 내면과 외부에서 미묘하게 파생하는 괴로움의 기류를 드러내는 데에 이렇게도 능하다.
영화의 엔딩씬에서는 그런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쇼팽의 선율이 다시 흐른다. 이 엔딩은 결국 아픔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지시하는 도돌이표처럼 관객의 눈과 귀와 심중에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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