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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엄마의 싸움(교육)과 아버지의 노름②
양반집서 태어나, 시집살이 견딘 ‘열다섯 소녀’
아들 죽은 당일, 밥하라던 시어머니…아버지 노름빚에 못 볼꼴도 여러번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4-02 20:39:22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지금부터 엄마의 삶을 적어보려 한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첩첩산중 개꼴이라 불리는 동네에 몹시 가난하게 살아오신 두 분이 계셨다. 그분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
 
할머니는 아주 별난 분이셨으며 친정이 윤 씨 가문에 양반이라고 자칭하셨고 할아버지는 아주 조용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할아버지와 담배 농사일을 하고 계셨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의성에 있는 만네라는 동네에 가셨다가 한 처녀(박란규)가 길을 가는 데 아주 얌전하고 참한 규수감이라는 걸 알고 며느리로 삼아야겠다고 작심을 하고는 그 처녀의 뒤를 쫓아가 그 집에 함께 들어가서 격식 없이 며느리로 삼겠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박씨 문중에 장손의 집안이며 아주 법도가 엄격하기로 동네가 다 알고 있는데 우리 딸은 다른 선비 댁에 혼삿말이 있다고 거절 을 했지만, 세상에서 윤 씨 가문이 제일 큰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할머니께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증조 외할아버지는 손녀를 황씨의 가문에 출가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 가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마음과 우리 문중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외갓집에 가서 강제로 데리고 갈 것이며 온 동네 다니면서 소문을 내겠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대항도 해보고 울어도 보고 애가 타는 마음을 시어른께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결국에는 할머니가 총각인 아버지를 데리고 함께 외갓집으로 가서 터무니없는 협박과 가당치도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박씨 가문에서는 통곡할 일이었다. 나날이 심해져 가는 할머니의 횡포와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외할머니는 딸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고 증조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마음 아프지만, 딸을 주겠다고 승낙하고 말았다.
 
열다섯 살에 시집오던 날 개꼴 골짝의 길이 얼마나 좁은지 길가에 온통 풀들이 가득해 가마를 타고 들어가는데 너무 흔들려 엄마는 어린 마음에 떨어 질 것 같아서 결국에 엄마는 가마에서 내려 한복을 이리저리 치켜들고 태어나 처음으로 십오 리나 되는 험한 산골길을 걸어서 시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둑어둑해졌는데 호롱불을 켜둔 채 격식도 없는 혼례를 치르고 방이라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 누워서 함께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앞뒤 옆을 보아도 모두가 산이었고 너무 무서워서 밤에 자다가 화장실도 못 가고 참기만 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엄마의 화려한 시집살이를 살펴볼까 하는데 엄마의 일생이 너무 안쓰럽다는 마음이 든다. 아침에 할머니는 밥을 하라고 뒤주에서 보리쌀 조금 꺼내주셨다. 큰솥에 나무를 때서 밥은 했는데 반찬은 된장과 소금이 전부였다. 다섯 식구는 그렇게 아침밥을 때우고 삼촌과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나무하러 산으로 가시고 난 뒤에 할머니는 집에서 글을 읽으시다가 빨래를 하라고 하셨다. 무명이불과 무명옷으로 꼭 삶아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냇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방망이를 두들겨가며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 갖다놓고 손을 녹여 가며 빨래를 끝내고 빨래를 보자기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와서 줄에 널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깨끗하게 빨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불빨래를 마당에다가 모두 펼쳐서 던져 놓고는 다시 빨아 오라고 하셨다.
 
철없는 우리 엄마는 문중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하나도 실천해볼 것이 없고 또 필요로 하지 않다는 걸 알고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했다. 때로는 밥을 다해 놓았는데 할머니는 정지에 오시더니 아궁이에서 재를 한 움큼 쥐고 밥솥 뚜껑을 열고 얹어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며느리 삼겠다고 쫓아다니시더니 결국 이렇게 하시려고 그렇게도 힘들게 엄마를 데리고 오셨는지... 할머니 왜 그리하셨나요.
 
할머니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참 멋진 인생이라고 자랑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살아보겠다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런 중에도 엄마는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네. 그 어린 나이에 이 어찌 된 일인가. 그냥 도망가버리지 못하고 고생만 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 왜 몰랐을까. 내가 볼 때는 고생할 것이 뻔한데 말이야.
 
그런 며느리를 보는 할아버지는 늘 엄마가 안쓰러워 밥을 먹을 때도 국에 있는 국물만 잡수시고는 건더기는 엄마 먹으라고 남기는 것이 일상이 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국건더기는 아이들이 많아 엄마한테는 아무것도 없고 빈 국그릇만 있을 뿐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들은 엄마를 생각하고 있을 마음도 없고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이 있으면 언니가 못 먹게 때려도 맞으면서 밥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어린 마음이지만 아무리 맞아도 먹을 것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인정 많으신 우리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셨으며 할머니는 밥그릇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두 손 모아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셨으며 아침마다 물가에 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는 우리 호락(삼촌)이를 여든여든 두 여든에 점지해주시라고 두 손 모아 하늘의 일월성신께 기도하곤 하셨다.
 
드디어 엄마는 대를 잇는다는 아들을 낳아서 잘 크고 있었는데 4개월이 지난 후에 그 어느 날 아이에게 열이 많이 났다고 한다. 엄마가 정지에서 아침밥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방에서 원어마 이리 잠깐 들어오너라 해서 엄마가 들어갔더니 너는 놀라지 말라 하시고는 아이를 안고 계시다가 ‘대원이가 죽었다’라고 힘없이 말씀하시면서 엄마한테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라고 건네주셨는데 너무 갑작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죽은 아이를 대충 싸서 큰골 막바지에 갔다가 묻어 놓고 오겠다고 하시면서 아이를 안고 총총걸음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후에 엄마는 아이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할머니가 오시더니 큰소리로 화가 나서 ‘핏덩어리 하나 없어졌는데 뭘 그렇게 울고 있어?’라고 꾸중을 하시면서 들어가서 밥을 해야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재촉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그 아이를 보낸 이야기를 할 때는 엄마가 늘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고 함께 느껴진다. 그런데 연이어 딸을 셋 낳고 난 후에는 할머니가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고 한다. 세 번째 딸을 낳고 난후에는 엄마한테 욕을 하면서 ‘이년아 눈이 열 다발이나 빠져 뒈질 년’이라던가 정말로 입에 담지 못하는 욕을 아주 심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양반집에서 교육받은 참한 사람이라 혼자 속으로 참고 견디면서 우리 팔 남매를 멋지게 키워냈다. 아버지를 새장가 보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하면서 엄마한테는 너무 인색하시고 함부로 대하는 우리 할머니는 아무도 간섭할 사람이 없다. 할아버지도 맨 날 할머니한테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고 지고 사신다. 이럴 때도 아버지는 노름했기에 할아버지와 엄마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놓으면 아버지가 노름하면서 빚을 졌기에 노름빚 받으려 사람들이 와서 온 집안을 다 뒤지고 할아버지한테 행패를 부릴 때 엄마는 내년에 씨할 것은 두고 가라고 했지만, 빚쟁이는 아주 냉정하게 홀랑 다 가지고 가버렸다고 했다. 이때 할아버지는 빚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사정했고 곡식을 다 가지고 가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 보기도 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빚으로 다 털리고 우리는 꿀밤을 주워 와서 묵을 끓여 먹기도 하고 봄이 되면 새벽부터 산에 가서 산나물을 한데레끼해서 허리에 차고 오면 배가 고파서 엄마는 쓰러질 것 같지만, 엄마라서 참고 또 참는다. 나물을 삶고 보리쌀 약간 섞어서 죽을 끓이고 있지만 기다리는 어린것들은 계속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소나무에서 송기를 벗겨 껍질로도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방앗간에 가서 보리 쌀겨를 가져와서 채로 치면 고운 가루가 나온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할아버지는 어려운 세상살이를 살아 보려고 땅을 치고 울면서 아버지한테 노름에서 손을 떼고 정신 차리라고 통곡을 할 때 아버지는 이젠 노름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이면서 작두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잘라버리겠다고 하시더니 뼈는 자르지 않고 살만 잘라서 피가 났으며 우리는 아버지가 손을 자르겠다고 작두 곁으로 갔을 때 몹시 무서워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내가 비록 어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구박받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마음은 잠시였다.
 
늘 집안은 싸움과 배고픔과 무서움이 감도는 삶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친 손가락을 붕대로 감고 그다음 날 새벽에 보니 어른들 몇 사람이 바위굴에 들어 앉아서 손가락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그 손으로 노름을 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정말로 노름이 이렇게 좋은 것일까 나는 엄마한테 와서 고자질했고 우리 집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래도 놓을 수 없는 아버지가 노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노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얼마나 됐다고 또 그 길을 가고 있는 건지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지가 아주 무섭고 싫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하루에 4갑 정도. 우리가 어렸을 때는 담배 농사를 짓기 때문에 담뱃잎을 종이에 돌돌 말아서 피우셨는데 그 종이는 할아버지가 교회 다니셨기에 성경책을 한 장씩 뜯어서 담배를 피우셨다 그 종이가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워 잎담배를 싸서 피우면 아주 좋다고 하시기에 나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멋지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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