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의사, 변호사, 검사, 양반, 경찰서장 등 전문직이나 고위직을 많이 맡았죠. 어느 역할을 하든 어떻게 하면 좋은 연기, 진실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작품에 임하고 있어요. 보는 사람들이 제 연기에서 진실을 느끼도록 하고 싶다는 게 제 욕심이죠. 예를 들어 나무 역할을 한다면 나무로서 존재감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무가 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감동도 주고 저 스스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죠.”
10월 어느 맑은 오후에 북한산이 가까운 우이동 한 카페에서 배우 홍서준 씨(53)를 만났다. 그는 드라마에서 냉철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여줬던 검사나 변호사를 연기할 때와는 다르게 기자일행에게 따뜻한 미소와 함께 편안하게 인사를 건넸다. 홍 씨의 첫인상은 외모가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사랑한 드라마와 영화, 연극 이야기를 통해 연기에 대한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저는 TV에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죠.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를 보면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벤허’나 ‘대부’ 같은 고전영화를 많이 접했고 연극 대본이나 드라마도 보면서 배우를 꿈꿨어요. 학창시절에 교회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이후에 극단에 들어가서 카페 연극을 한 적도 있어요. 낮에는 카페인데 저녁에는 연극공연을 하는 곳이죠. 새벽에는 연극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기도 했어요. 젊은 시절엔 연기에 대해 잘 몰랐지만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만큼은 넘쳐났죠.”
20대 연극무대 활동 시작해 긴 무명시절을 겪기도
21세 때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홍 씨가 줄곧 연기의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군 제대 이후 25세에 가수를 준비했고 28세에는 야심 차게 음반을 발매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연극영화과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했지만 남들을 지도·평가하는 것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만두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그는 연극 ‘급매 행복아파트 천사호’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키스할까요?’ ‘아테네의 타이먼’ 그리고 뮤지컬 ‘칵테일’ ‘우리동네’ ‘위대한 캣츠비’ 등에 주연배우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에는 ‘바람의 노래’ ‘숙희’ ‘출근’ ‘위선자들’ ‘숲속의 부부’ 등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엔 저와 비슷한 나이에 데뷔해 연극무대에서 성공해서 배우로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어요. 나는 언제 배우로 인정받아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었죠. 연기에 꿈은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연기를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어요. 배우로 활동하면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먹고살 걱정도 해야 했는데 몇 년 안에 연극에서 자리를 못 잡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도전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홍 배우는 그동안 수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자신의 연기에 영향을 준 영화는 주로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라고 소개했다. 그 중에서 사형제도 이야기를 다룬 ‘데드맨 워킹’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숀 펜의 연기에 감명을 받았고, 안락사 문제를 다룬 클린트 이스트 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역시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홍 씨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어바웃 타임’이라고 말했다.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의 리처드 커티스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는데 이 영화에서 영국 배우 ‘빌 나이’의 연기를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고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로는 ‘밥상 차리는 남자’의 박민호와 ‘이태원 클라쓰’의 김 실장, ‘검법남녀’의 유태준 변호사를 꼽았다.
전문직 역할을 맡으며 믿고 보는 대세 배우로 성장
“‘밥상 차리는 남자’는 저의 비중이 컸던 작품이고 착한 본부장에서 악역으로 바뀌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기도 한 캐릭터지만 제가 원하는 연기는 잘 해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었어요. 올해 출연한 ‘이태원 클라쓰’에서는 김 실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서 배우로서 행복했었죠. ‘검법남녀’는 유태준이라는 캐릭터 표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즌1부터 출연해서 재벌 3세 밑에 있는 변호사로 나오는데 악역이라 어떻게 연기할까 하는 고민이었죠. 그런데 역할이 약간 코미디가 있는 허당기가 있는 캐릭터로 바뀌면서 반응이 좋아 분량이 늘어나게 됐어요. 시즌2에서도 악의 고리로서 저의 존재감이 드러났죠.”
그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많은 캐릭터를 선보였는데 그가 맡았던 배역 중에 기억에 남는 역할은 의사, 변호사, 검사, 형조판서, 검사장, 경찰서장 등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나 고위직이었다.
홍 씨가 그의 이름을 많은 사람에게 알린 드라마로는 올해 상반기에 방영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가 있다. 이 작품은 종편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부부의 세계’와 ‘SKY캐슬’의 뒤를 이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연으로 나온 박서준, 김다미, 유재명의 인기도 높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주연배우 못지않게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가 바로 홍서준 씨다. 홍 씨는 유재명 배우가 연기한 장 회장의 오른팔로 등장했던 비서 김 실장 역을 맡았다.
“제가 연기하는 전문직 캐릭터는 작품마다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연기자 입장에서는 인물이 내면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연기하고 있어요. 작품의 특색에 맞게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잘 소화하려고 노력하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가 인기를 얻고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저를 많이 알아봐주시고 좋아해주는 것은 수십년간 배우로 활동하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살고 있는 동네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사람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거나 사인 요청을 해와서 꾸준히 배우로 활동하기 잘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특히 가족들이 많이 좋아하고 제가 활동하는 것을 응원해주고 있어서 항상 행복하죠.”
홍 씨는 최근 새로운 드라마 촬영과 출연 중인 연극 ‘흑백다방’ 연습과 공연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흑백다방’은 2014년 ‘한국 2인극 페스티벌’에서 작품상, 연기상, 극본상을 받았고 2015년 제2회 ‘서울연극인대상’에서는 작품상과 연기상을 받으며 평단과 관객들에게 호평 받은 작품이다. ‘흑백다방’은 1980년대 민주화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하면서 20년 뒤에 다시 만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게 됐어요. ‘흑백다방’은 2인극 형식인데 제가 준비한 연기를 얼마나 잘 표현해내고 잘 전달해야 하느냐가 중요하죠. 연극에서 정말 중요한 건 관객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코로나로 인해 연극 관람이 힘들긴 하지만 많은 관객이 예전처럼 다시 공연을 찾아오시길 바라고 있어요. 연극에서는 관객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관객이 없으면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기 힘들기도 해요.”
홍 배우는 연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참된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삶에서 거짓된 삶을 멀리하고 연기자로서 진실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진심을 담아서 연기를 할 때 그 진실이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홍 씨가 생각하는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물었더니 그는 바로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가 함께 있어 행복하고 연기도 더 잘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제가 힘들 때 옆에서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는 존재가 가족이죠. 아내가 격려도 많이 해주고 또 아이들은 저의 삶의 활력소예요.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제 연기도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앞으로 가정도 잘 지키면서 오랜 기간 배우로 활동하고 싶어요.”
[정동현 기자/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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