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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를 뜨겁게 달궜던 ‘프리즈’(Frieze), 세계 3대 아트페어라는 위상과 명성 그대로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며 떠났다. 거의 같은 기간 코엑스에서 ‘서울국제아트페어’(KIAF)가 공동으로 개최되었다. 입장객이 무려 8만여명에 달했으며, 프리즈의 매출은 수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으니 한국미술시장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동 개최를 통해 우리 미술시장이 세계 무대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을 확인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공동개최의 시너지보다는 쏠림 현상이 발생하여 적지 않은 우려도 낳았다. 역시 우리 미술시장의 기초체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과제가 명백해졌다.
또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기업들이 세계 무역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비결, 즉 세련된 전략과 역량을 도입하여 전방위적인 진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프리즈에 필적할 체급이 미달이지만, 한민족 특유의 근성과 역량으로 머지않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각성을 시작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하면 기어이 정상에 오르는 것을 우린 지금까지 무수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역시 좋은 작가의 발굴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독창성과 창작역량이 뛰어난 작가를 발굴하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총력적이고 기발한 매니지먼트가 요구된다. 이러한 과제를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방문한 첫 전시장은 안국동의 ‘갤러리플로우’였다.
한국화가 유한이 개인전. 얼핏 보면 그는 건축설계도면 같은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건축회화 같은 화풍의 발단은 바로 ‘동궐도’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위에서 바라본 시각의 부감법으로 그린 동궐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랜 세월 속에서 폐허가 되거나 변형된 문명의 저장소인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곤 하는 작가는 그림 속에서 과거의 사람들에게 많은 물음을 던진다.
작가의 그림은 본질적으로 투시도이다. 막혀 있던 성벽, 벽 등으로 인해 생기는 공간의 분리가 필요 이상으로 차별이 되었던 역사를 익히 직시하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많은 것들이 소통하고 자연스러운 생의 공간으로 활성화된다.
“동질적인 자연의 영토를 두 개의 영역으로 가르는 성곽의 경계짓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경계를 허물며, 동시에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깊은 통로는 인위적으로 단절 혹은 차단의 억압을 상상 속에서 지우는 것이다.”(작가노트)
작가는 하나의 유적을 발굴해 나가는 발굴자와도 같다. 오랜 세월 속에 폐허가 된 도시 유적지를 발굴할 때, 조심스럽게 브러쉬로 먼지나 이물질을 제거해 나가는 발굴자들처럼 조심스럽게, 아주 신중하게 대상에 접근해 들어간다. 어떤 때는 돌멩이 하나 벽돌 하나 추스르고 닦아 내는 것으로 하루해가 진다.
발굴자가 오랜 시간이 집적된 오브제의 이물질들을 털어 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와의 대화를 상상하곤 한다. 그러한 세정 과정은 가는 선을 곧게 그어 가는 것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무슨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스토리보다는 그들의 풍속과 삶의 욕구·꿈·아름다움의 척도와 같은 역사 이면의 것들을 차분하게 묻곤 한다.
또한 작가는 복원을 하기도 한다.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 둘 수습하여 상상적으로 정렬시켜 가는 복원이다. 창경궁이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전락했던 어두웠던 역사를 반추하면서 많은 상상력과 고증을 통해 복원을 도상적으로 구현해 나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건축적 구조와 기능을 유추하면서 복원하는 설계도인 것이다. 복원을 해 나가는 과정도 역시 신중하여 그 넓은 화면에 가는 선을 수도 없이 곧게 그려 나가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 선들에 더러는 색을 넣어 보기도 한다.
작가는 오랫동안 건축적 회화라는 독특한 양식을 빚고 있지만, 건축물 모티브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과거의 기억들이나 과거의 기록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건축물에서만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블랙박스 영상 속 인물들이나 다른 과거 사진 같은 것들에서도 영감을 얻는다. 블랙박스 속에 우연히 포착된 익명적 인물들을 조심스럽게 재현하고 있다.
무심코 무단횡단을 하거나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여기서의 미세한 직선들로 직조된 듯한 흐릿한 화면은 조금 다른 것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일종의 그물망 같은 사회환경이라 할까.
오늘의 문명 속에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메커니즘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라니, 처음엔 엿보기 자체가 흥미롭다가 점차 사회 혹은 구조의 문제로 비약되면서 다소 경직되게 하는 데가 있다.
근작에서도 여전히 건축적 모티브가 지속되는 가운데, 개인적인 기억 속 장면들을 소환해 내 기억의 안식처를 구축하곤 한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외할머니의 저택, 자신이 뛰어놀던 동선들을 더듬어가며 커다랗게 연결된 화폭 위에 복원의 도면을 그려 간다.
씨실과 날실의 선들이 교차된 망사 같은 화면 위에 부재의 공간들이 어렴풋이 잡힐 듯 말 듯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마당 한편에 탐스럽게 피어 있던 덩굴장미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작가는 의외로 가는 직선에 최적화되어 있으면서도 거대 스케일의 벽화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과거 벽화에서 보여 준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도시 전체를 담는 프로젝트가 가장 작가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산업화 이후 너무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우리 도시가 작가의 화면에서 빠짐없이 복원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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