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3] 나는 에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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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르면 떠오르는 풍경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2 06:30:05

정하운이 비상용으로 준비해 두었던 에피네프린을 최 박사에게 주사했다. 잠시 이대로 있으면 된다고, 그가 정하운과 나를 안심시켰다. 긴장이 풀린 나는 후우,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옆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다.

“이불을 가져올까요?”

“아니에요. 지금은 추운 게 좋아요.”

뇌로 가는 혈액의 양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려면 체온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최 박사도 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였다. 주결은 차를 끓일 때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연약하게나마 심장이 제 기능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숨을 돌리는 사이, 에바의 방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게 보였다. 불이 꺼진 걸 알고 올라왔다가 정하운과 내 이야길 들은 게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가 내쉬는 호흡이 차츰 편안해지고 있었다. 느렸지만 가슴도 차츰 안정적으로 오르내렸다. 쓸쓸하고 연약하지 않은 인생은 없는 것인가. 주결이 가슴을 움켜쥔 채 홀로 죽음을 마주하던 시간은 얼마나 많았을까. 에바의 방에서 흘러나온 쓸쓸한 빛이 주결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독일에 출장 갔을 때 만났어요.”

정하운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위험했고 에바의 방은 추웠으므로 최 박사를 부축해 내 방 침대에 뉘었을 때였다.

“박사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랐어요.”

“왜, 살아 있다면 왜 한 번도?”

묻는 순간 답이 나오는 주결의 질문은 공허했다. 한 번이라도 찾아올 수 있었다면 그녀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결은 침통하게 입을 꾹 닫았다. 괜찮으니 두 사람 모두 내려가라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그의 힘세고 완고한 턱이 바르르 떨렸다.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갑순의 것인가?”

내가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정하운을 내려보낸 뒤였다. 눈을 뜬 주결이 입을 열었다.

“읽어 주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노트를 눈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나는 노트를 집어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정하운이 방에 들어오기 전 읽고 있던 부분, 그다음을 찾아 소리 내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지금 내 옆엔 ‘데미안’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일을 끝내고 와서 사전을 찾아 가며 한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사전 없이 읽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독일에 와서 헤세의 ‘데미안’을 독일어로 읽는 감동을 당신께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라며 싱클레어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주었던 여인 에바. 예상하고 계실 테지요. 나는 내 이름을 정했습니다.

머나먼 이국에 와서 나는 에바(Eva)가 되었습니다. A는 반드시 에이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그것이 ‘아’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처음엔 이상했는데 이젠 ‘에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름에 대해 생각합니다. 일국·수연·효정·혜준·지연·인상…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들의 얼굴이,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두 언니가, 손잡고 노래하던 소녀와 짓궂기만 했던 소년과 함께 뛰어놀던 유년이, 하늘의 빛깔과 뭉게구름과 햇빛과 풀 냄새가 가슴 아프게 떠오릅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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