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건청궁과 윤석열의 용산 대통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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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0 09:22:36

연휴 끝자락에 경복궁 나들이를 했다.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는 ‘청와대 가는 길’, 5번 출구는 ‘경복궁 입구’이다. 도심 속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입구부터 붐볐다. 그리고 사분의 일은 외국인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온 백인들, 히잡을 쓴 무슬림들, 인도인들, 그리고 말소리를 들어야 구분이 가는 일본인과 중국인들. 우리 옛 궁에 왔는데 분위기는 글로벌이다. 외국인들도 거의 한복을 입었다.

화창한 가을날, 인파에 밀려 흥례문으로 쓸려 들어갔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분명했다. 을미왜변을 포함한 고종과 명성왕비의 행적을 둘러보고 역사적 현장을 지켜본 나무들을 만나는 것이다. 근정전·경회루를 관람하고 궁궐의 북쭉 구석 건청궁으로 향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했지만 고종은 웅장한 강녕전과 교태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궐 중앙에 자리한 처소를 버려두고 후미진 곳에 작은 궁을 지었다. 구불구불한 거대한 소나무가 호위하는 향원정 연지가 바라다 보이는 터였다.

이름이 ‘궁’이지 규모와 모양새는 소박한 사대부가의 모습이다. 임금의 거처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곳에 장안당과 곤녕합을 짓고 가까운 곳에서 부부가 정답게 기거했다. 을미왜변 당일, 다정한 부부의 소박한 처소에 침입한 왜군 병사들과 칼잡이들은 만류하는 왕을 제지하고 왕비를 찾아낸다.

왕비는 옥호루에서 죽임을 당했고 난자되어 훼손된 시신은 건청궁 동쪽 녹원에서 불태워져 향원정에 던져졌다. 하지만 시신이 가라앉지 않자 다시 수습하여 녹원 어딘가에 묻어 버렸다. 침략자들은 이날 왕비를 찾으려 궁녀 여럿을 잔인하게 죽였고 어린 세자비의 머리채를 쥐고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세자비가 왕비 거처를 대지 않자 그녀를 죽은 병사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음력 8월20일의 일이니 요맘때다.

일제가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이 왜변에서 왕비를 벤 자는 일개 낭인이 아니고 경성수비대 본부 소속의 소위였다. 옥호루 앞에는 왕비와 그날의 참상을 소개하는 예닐곱 줄 정도의 간단한 안내문이 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건청궁을 여러 방향에서 들락거렸다. 그날 고종은 어디로 달려 나왔을까, 세자비는 어디로 던져졌을까, 비운의 왕비는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을까, 궁녀와 상궁들은 어떻게 함께 스러졌을까.

▲ 화려한 경복궁 북쪽 한 켠에 왕과 왕비의 거처로 고종이 지은 건청궁 입구. 이름이 ‘궁’이지 규모와 모양새는 소박한 사대부가의 모습이다. 을미왜병 때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곳이다. [사진 제공=필자]

문득 마당을 가득 채운 관람객이 눈에 띄었다. 곤녕합 뜨락 옥호루가 보이는 곳, 궁녀들이 드나든 툇마루에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서. 그들은 슬프고 억울한 왕비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전각에 가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심정이었다. 나라를 지키고자 남편을 보필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아내가 적의 침입으로 한 순간에 잔인하게 베어졌다. 그러고는 처절한 시신이 되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제국주의자들의 마녀사냥 희생물이 된 그녀에게는 악녀, 부패한 왕비의 프레임이 덮여졌다.

궁궐 북쪽 구석에 소박한 거처를 지은 고종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길고 긴 세도정치의 끝자락에서 왕권을 세워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뜻을 이어, 전란으로 허물어진 나라를 일으키고자 혼신을 다했던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 하지만 그조차도 무능하고 유약한 황제라는 누명을 쓴 채 억울하게 독살되었다.

하지만 후손은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의 고뇌와 애국심, 그의 지략과 번민을. 우리는 왜 아직까지도 자신의 모습을 남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국모의 시신이 잠긴 너른 정원 녹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녹원 가장자리 해묵은 고송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담장 너머로 빼냈다. 할 말이 있나 보다. 다음에 와서 그의 기억을 들어 보련다. 그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알고 싶다.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을 나오니 바로 청와대 가는 길과 연결된다. 경복궁 못지않게 청와대도 관람객에게 인기다. 청와대행 관광버스도 오간다. 청와대를 내놓고 훌쩍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긴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이전할 때처럼 고종이 건청궁으로 처소를 옮길 때도 엄청난 반대를 뚫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결단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느끼는 국가적 위기감은 무엇이었을까.

고종은 을미왜변으로 아내를 잃고 나서 곧바로 마음을 추슬렀다. 일제가 예측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대한제국 건국을 선포한다. 대한제국은 아시아 2위의 군사국가였다. 자주 국방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천명한 광무제의 노력이다.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는 독립항전의 뿌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바로 건청궁에서 기획됐다. 윤 대통령의 용산시대를 환영하고 지지한다. 화려한 청와대를 마다하고 소박한 집무실을 택한 제20대 대통령의 결단과 뚝심으로 대한민국은 위기를 딛고 다시금 도약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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