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순교자 손양원 이야기는 우릴 비춰 주는 큰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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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세기 이차돈은 흰 피를 뿜어 불교 선물
자유의 대한민국 자체가 현대사의 놀라운 기적
살인자 안재선도 연구 대상... 광기의 끝 보여 줘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22 06:31:10

손양원 목사 얘기를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몸살이 날 판이다. 무엇보다 교회의 틀에 갇혀 있는 그 이야기를 꺼내 세상에 온전히 돌려줘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실은 손양원 스토리엔 아버지 손종일 장로, 아내 정양순 사모 그리고 두 아들 등 5명이 함께 있다. 손양원만 우뚝 솟은 게 아니고, 각자가 모두 특별한 역할로 우리 시대 또 다른 성(聖)가족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일테면 손양원을 온전히 손양원으로 만든 건 아내 정양순 사모의 몫이다.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로 무기징역형을 살러 가는 남편 뒤통수에 대고 “감옥에서 무릎 꿇으면 그땐 내 남편 아니오”라고 으름장 놨던 철의 여인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초기교회 특유의 말뚝 신앙이다. 결정적으로 두 아들을 총살했던 안재선을 가슴에 품은 것도 그녀의 역할이었다.

남편은 그를 양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했으면 됐지만, 살인자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며 보듬어 주고 매일 밥을 해 주는 게 어디 쉬웠겠는가? 그 결과 6·25 전쟁에서 손양원이 순교했을 당시 정양순 사모와 함께 빈소를 지키며 든든한 맏상주 노릇을 한 것은 양아들 안재선이었다. 여기 가슴 뭉클해지는 사진이 한 장 있다. 1950년 9월 손양원의 시신을 앞에 두고 정양순 사모와 함께 찍은 두건 차림의 안재선 모습이다.

형제 살해범에서 의로운 아들로 돌아와 제 역할을 다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앙의 기적을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현대사 최악의 카인’에 해당하는 그가 했던 살인 행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고, 용서 받은 이후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1979년 48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전에는 서울 상계동에서 아파트 경비원 등으로 생업을 꾸렸다. 삶이 순탄치 못했다는 뜻인데, 실은 젊을 적 한때 몰두했던 신학 공부도 중도 포기했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씻지 못한 채 평생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한 피난처이던 아버지(손양원)마저 순교한 후 그는 갑작스럽게 초라해졌다. 늘 어두운 곳만 찾아다녔고, 교회에서도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거리곤 했다.”

손양원의 맏딸 손동희(90) 씨의 기록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실 너무 끔찍해 언급하기조차 두렵지만, 그는 손 목사의 두 아들 총살을 주도했던 좌익학생이었다. 총살 전 구타행위와 함께 “예수 사상을 포기하라”는 협박 공갈은 물론이고, 총살 직후 확인사살까지 감행했던 정말 최악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다.

▲ 1950년 9월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시신을 앞에 두고 양어머니 정양순 사모(가운데)와 함께 있는 두건 차림의 안재선. 당시 그는 장례식에서 든든한 맏상주 노릇을 했다. 필자 제공

신학교에 다닐 무렵 “십자가의 군병이 되겠노라”고 양아버지 손양원에게 맹세한 건 뭐였을까? 일시적 회개였을까? 너무 큰 죄악이란 순교와 사랑으로도 끝내 씻어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일까? 단, 죽기 전 안재선은 손 목사의 세 딸 등 가족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안수기도를 받았다. “하늘나라에서 너희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련다”는 진솔한 말도 남겼다.

그리고 안재선의 자녀 4남매 중 한 명은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니 인간사 대하드라마는 아직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어쨌거나 손양원 가족의 순교는 사랑과 용서를 선포한 20세기 정신사의 일대 명장면이지만,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광기도 동시에 보여 줘 우릴 거듭 전율케 한다. 더없이 높은 사랑과 최악의 어두움 사이의 간극 앞에서 우린 새삼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보다 더 소설 같고, 구약성경 최초의 살인에 못지않은 근원적인 선악의 세계가 맞다. 큰 시야로 보아 손양원 가족의 순교는 6세기 신라 이차돈의 이야기와 비견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당시 불교 유입을 둘러싼 갈등에서 그가 순교를 자청하자 잘려나간 목에서 흰 피가 치솟았다. 그런 이적(異蹟) 앞에 드디어 평화가 도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 같아서는 손양원 가족 순교 직후 즉시 정의구현과 함께 지상천국이 펼쳐졌어야 옳다. 홍위병 좌익학생은 물론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무리가 코앞에서 거꾸러지는 게 맞지 않을까. 인류사 최악의 노예국가 북한이 해방되는 기적이 이뤄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그런 순리 대신 지금 세상은 주사파 천국으로 거듭 혼란스럽다. 어찌된 일일까.

실은 지금 건재한 대한민국 자체가 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 내로라 하는 제조업 강국에 소프트파워 K컬처로 무장한 매력 국가는 우리나라 말고 없다. 그런 근현대사의 뼈대를 세운 힘의 8할이 기독교라는 걸 누가 부인할까? 손양원 가족 이야기는 거듭거듭 우리 자신을 비춰 보게 하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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