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평생 좌파에 봉사해 온 한 원로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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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몸은 보수 꿈은 진보’라며 오래 대중 현혹
국가 체제 위기 부채질해 온 점 스스로 반성해야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9 06:31:00

신문기자 후배에게 “원로입네 해 온 기자 출신 남재희를 곧 도마에 올리는 글을 쓰겠다”고 밝혔다. 대뜸 그가 손사래부터 쳤다. “그분 나름 훌륭하지 않던가요? 대단한 장서가에 풍류도 있고….” 선배 한 분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좌편향이 맞지만 저쪽 진영에 몸담았던 일은 없었거든? 그 양반, 말뿐이었어.” 그럼에도 올해 나이 90세 남재희를 한 차례 다루기로 했다.

그야말로 안 그런 척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좌파 동네에 도움을 줘 온 대표적 위선적 리버럴리스트의 한 명이란 판단 때문이다. 그런 부류가 한둘인가? 영화계의 김동호(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임권택(영화감독)·기독교의 김장환 목사·손봉호 교수 등을 나는 이미 올해 초 손본 바 있다. 더구나 남재희가 얼마 전 펴낸 두툼한 책 ‘시대의 조정자’(민음사)를 훑어보며 쓴웃음부터 나왔다.

시대의 조정자? 모자가 크기만 하면 좋은 줄 아는 허세다. 그가 쓴 다른 책 ‘언론 정치 풍속사’ ‘진보열전’ 등도 두루 읽었지만 확실히 그는 미스터리다. 한국일보·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개발연대인 1970년대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주필을 거쳤다. 이후 민정당 간판 아래 4선 의원을 했고 노동부 장관도 역임했다. 박정희·전두환 두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으며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는 노태우의 대선 캐치프레이즈도 그의 작품이었다.

희한한 건 따로 있다. 그는 “꿈은 진보에 있으나 몸은 보수에 있다”는 시인 고은의 말을 지금도 즐겨 인용한다. 성추행범에 간첩 혐의가 있는 고은과는 1960년대 이후 술친구 사이다. 그렇다. 실은 한국 사회엔 허점이 있다. 케케묵은 학교 시절 성적을 사람 판단의 잣대로 삼는 풍토 말이다. 사실 그는 그 옛날인 1952년 서울대 의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2년 뒤 “이게 아니다” 싶어 서울대 법대에 재입학했다는 소싯적 얘기가 지금껏 그를 장식해 주는 이력으로 통한다. 언론인 천관우·군인 민기식과 함께 그가 청주고 3대 천재란 말도 있다. 원 세상에, 갈고 닦지 않으면 천재가 뭔 소용일까? 결정적으로 그는 평생 ‘체제 내 리버럴’을 자처해 왔는데 그게 최악이다. 자유주의 냄새 풍기는 걸로 지식인 책무를 대신해 왔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가 리버럴 자체를 이해 못 할뿐더러 리버럴을 방패 삼아 온갖 꼴값을 벌여 왔다는 데 있다. 그의 자랑 중 하나가 시인 김지하 석방을 전두환에게 건의해서 즉석에서 오케이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단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자신의 주도로 기존의 광주사태란 말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작명했다고 한다. 그걸 당에서 의결해 민화위(민주화합추진위원회·당시 인수위의 이름)에서 선포했다.

그걸 그는 “일대 결단”(‘시대의 조정자’ 131쪽)이라고 지금도 거품 문다. 광주사태가 이후 어떻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암덩이로 변질됐다는 걸 그 자신만 모르는 듯하다. 그런 남재희가 ‘철부지 노인’이란 걸 확인시켜 주는 게 따로 있는데, 그게 학원안정법 파동 문제다. 그건 전두환 대통령이 주사파를 대청소하기 위해 85년 작심하고 뽑았던 회심의 카드였다.

하지만 그걸 민정당 내부에서 자신과 당시 현홍주 의원이 주도해 저지했다는 게 평생 그의 자랑이다. 남재희야말로 지금의 주사파 천하를 만든 원인 제공자란 뜻이 아닐까? 그런 게 한둘이 아니다. 명백한 간첩으로 실형까지 살았던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을 “착한 돈키호테”라고 극력 옹호(‘진보열전’ 56쪽)한다. 그는 세상이 알 듯 북한 공작금 210만 달러를 받아 1992년 구속된 자가 아니던가?

하긴 남재희는 서울대 법대 2학년 시절 죽산 조봉암을 만난 것을 ‘영광’이었다고 자기 책에서 고백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지금도 정치 신앙인 듯하지만 속은 텅텅 비었다. 실제로 이런 말도 했다. “내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해방 공간에서 몽양 여운형을 따랐고, 10년 늦게 태어났다면 죽산 조봉암을 따라 진보정당에 투신했을 것이다.” 맙소사!

헛똑똑이 남재희의 정치 의식이 그렇게 휑뎅그렁하고 볼품없다. 사실 남재희가 평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단 한 줄이라도 표현한 바 있을까? 있다면 50년대 유행했던 중립화통일론 따위 시대착오적이고 몽환적 용어가 전부다. 거기에 이른바 혁신 계열의 송남헌·송지영·이동화, 소설가 이병주 등과 교유하면서 술 마시던 걸 풍류라고 뻥을 쳐 왔다.

자 마무리다. 요즘 좌파는 남재희를 ‘진흙 속의 연꽃’이라고 연방 칭찬한다. 갖고 놀기 좋은 것이다. 그런 추임새에 흐물흐물해진 그에게 오늘 나는 새삼 묻고 싶다. “당신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멀쩡한 지식인이 없고, 그게 이 나라 체제 위기를 부채질한다는 걸 알긴 아시는가?” 어쨌거나 말년에 부디 건강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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