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왜 높은 나뭇가지가 바람 잘 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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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0-06 06:31:30

여름이 한창인 때, 무작정 짐을 쌌다. 온몸의 원인 모를 통증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휴식’이었다. 그동안 에너지를 사용만 했다. 집 안에서 집 밖에서 할 일만 가득하다 보니 너덜너덜한 심신만 남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양배추와 토마토를 잔뜩 챙기고 4박5일의 제법 긴 여정에 발을 디뎠다. 자체 기획한 생애 첫 휴가였다. 휴식이 목적이었지만 글쓰기를 위한 노트북과 자료도 나를 따라 나섰다. 그렇게 TV가 없는 밝고 조용한 파주의 숙박시설로 들어갔다.

무엇이 되고 싶은 ‘곰’처럼 매일 방 안에서 야채·과일만 먹었다. 곰의 마음을 달래 주듯 며칠간 비가 주룩거렸다. 비가 그친 날 책이 가득 찬 공간으로 나가 통유리 너머 나무가 보이는 깊은 의자에 몸을 담그고 석양에 바람을 맞는 나무를 보게 되었다. 바람은 제법 힘 있게 나무와 포옹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저 멍하니 바람과 나무를 바라보던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도 있는데, 가지들이 바람에 어떻게 흔들리는가 보자.’ 이런 여유로움은 오랜만이었다. 엄마가 된 이후로는 가져 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크든 작든, 잎이 넓든 좁든 나뭇가지들은 바람 타고 춤을 추었다. 리드미컬한 그들의 춤은 내 마음을 즐겁게도 안타깝게도 했다. 바람이란 손님을 최선을 다해 응대하고 곧바로 균형을 유지하러 발걸음을 돌리는 가지들은 현명하고 애틋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순간, 나의 나른한 눈에 전혀 새로운 모습이 잡혔다. 모든 가지들이 손님맞이에 바쁜 게 아니었다. 밑에 있는 작은 가지들은 한가했다. 그들은 까다롭고 피곤한 일은 윗가지에 맡기고 그 밑에서 여유롭게 살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보았나?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데, 바람이란 바람은 모두 높이 솟은 가지가 맞고 있질 않나!’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일고여덟 그루의 나무를 모두 찬찬히 살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밑가지들은 어떤 바람 속에서도 평온하게 지냈고 위로 솟은 나이 많은 가지들이 바람을 맞아 휘청거렸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태양과 바람과 나무의 만남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구나! 먼저 태어난 가지, 어른 가지들은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중이군.’ 이 생각이 머리를 탁 때렸다. 아이들은 별 걱정이 없다. 부모에게 자기가 필요한 게 뭔지 신호만 보내면 된다. 아직 말을 못 해도 부모는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 시야에 들어온 일고여덟 그루의 나무를 모두 찬찬히 살폈다. 예외 없이 밑가지들은 어떤 바람 속에서도 평온하게 지냈고 위로 솟은 나이 많은 가지들이 바람을 맞아 휘청거렸다. 모든 가지들이 손님맞이에 바쁜 게 아니었다. 밑에 있는 작은 가지들은 한가했다. 필자 제공

그날은 근처에서 초등학생들이 몰려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재잘대던 날이었다. 콘센트를 찾아 노트북을 켜고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얼굴엔 근심과 염려가 없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이 지나면서 하나둘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중간에 위치한 가지가 된다. 아주 잠잠할 순 없다. 더 자라 부모가 되고 사회의 중견 책임자가 되면 그들도 바람을 몸으로 맞아야 한다.

조직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맨 꼭대기에 있는 가지는 처신이 힘들다. 산들바람과 태풍과 비와 우레를 한 몸에 감당해야 한다. 그게 싫다고 떨어져 나가면 혹은 어쩔 수 없이 꺾이면 아직 미성숙한 밑가지들이 그 일을 해야 한다. 지도자는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롯이 혼자서 별별 일을 감내해야 한다. 꼭대기에 솟은 가지가 그렇듯 동양의 ‘군자’는 어려울수록 단단해지는 지도자이다.

당신은 군자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늘 마음이 복잡하고 많은 도전이 밀려오고 사는 게 힘들면 당신은 어른이고 지도자이고 군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뒤돌아 생각해 보자. 어린아이였을 때, 갓 신입사원이었을 때, 부모가 되기 전의 당신의 삶은 심플하고 나름 편안했을 것이다. 맨 아래 가지거나 그 바로 위 가지였으니까. 누군가 당신을 책임져 주고 짊어져 주었을 것이다. 높이 솟은 가지의 그늘 아래서 별 이슈 없는 평온한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당신이 성장했을 때 자신이 꼭대기 가지란 걸 알게 된다.

더 이상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고 비·바람·천둥·번개를 홀로 감내해야 하는 날이 온다. 이제 당신은 혼자이고 어른이고 군자가 된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그랬다. 천천히 삶이 나를 조여 오던 순간이 있었다. 의논할 상대가 없어지고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원망만 쏟아졌다. 폭우가 쌓여 아픔이 되었다. ‘높은 가지만 바람 잘 날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그 바람을 상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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