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칼럼] ‘바다에 쟁기질’한 인생들의 역할 아직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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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0-25 06:31:10

미국의 조지 워싱턴(1732~1799)과 남미의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독립 혁명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사심없는 직무수행으로 지폐에 모습이 새겨진 영웅들이다.

볼리바르는 남미 6개국(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에서 최고의 영웅이다. 그는 47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대통령직과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12년간 통치하면서 몇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 혁명에 몸을 바친 사람들은 바다에 쟁기질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대중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답잖은 폭군들 차지가 될 것이다.”

볼리바르를 가장 추앙하는 나라가 베네수엘라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베네수엘라 화폐 단위의 명칭이 볼리바르다.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에 따른 초 인플레이션으로 2021년 10월, 기존의 화폐 가치를 100만분의 1로 줄이는 화폐개혁(디노미네이션)을 실시했다. 불과 3년 전(2018년 8월)에 10만분의 1 디노미네이션을 했음에도! 베네수엘라 등의 모습을 보면 200년 전의 예측이 별로 어긋나지 않아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볼리바르는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 감동·감화받은 운동권 청년(혁명가)이었다. 볼리바르는 남미를 미합중국처럼 만들기 위해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여 그란콜롬비아를 건설하고 초대 대통령(1819~1830년)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와는 달랐다. 재임 중 격렬한 정치 갈등과 분열의 조짐을 보고 그는 자신이 인생을 바쳐서 한 일이 ‘바다에 쟁기질한 것’과 다름없다고 한탄한 것이다. 볼리바르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역사학자이자 경영사상가인 니얼 퍼거슨(1964~ )은 자신의 저서 ‘시빌라이제이션’(2011)에서 그 이유로 북미보다 훨씬 심한 남미의 인종적 균열·토지 소유 집중·민주적 자치와 통치 경험 부재·높은 문맹률·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종교의 부재 등을 제시했다.

필자를 비롯하여 ‘민주화운동동지회’에 모인 운동권 성찰파 상당수는 볼리바르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다.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화운동이 남미와 비슷한 이유로 변질되고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숱한 실패와 좌절을 성찰하면서 민주공화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작동하고 있는 미국, 서부·중부 유럽, 일본과 저질화·좌익화·퇴행화되고 있는 한국·필리핀·남미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선진화) 조건도 알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의 하드웨어는 횡적으로는 가치 배분의 원리에 따라 국가(권력)·시장(경제)·사회(공동체)이고, 종적으로는 포괄·규율 범위에 따라 중앙·지방·마을(소지역)·가족·개인이다. 국가·시장·사회는 전문 직업인인 정치인·공무원·기업인·종교인·전문가들이 움직인다.

그러면 소프트웨어는 무엇일까? 제도 단위들 간의 종적·횡적 역할 분담의 원칙인 보충성의 원칙, 공직자를 포함한 전문 직업인의 소명과 윤리를 규율하는 직업윤리, 개인·가족의 정신과 행동을 규율하는 시민적 덕성이 핵심이다. 이 모두를 규율하는 이념이 바로 자유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공동체주의·민족주의와 종교(유교·기독교 등)이다. 한국은 하드웨어 구조 상 미국·유럽·일본보다 국가(중앙정부)에 의한 조정과 통제를 훨씬 많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도, 지자체장·법관·당 대표도 전횡이 가능한 구조이다.

그런데 민주화의 이름으로 오직 대통령의 권력만 제왕적이라면서 견제·균형 장치를 늘리니 나머지 소(小)제왕들의 전횡이 더 심해졌다. 이재명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하면서 벌인 범죄가 그 징표다. 자칭 민주 진보는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시장을 규제로 칭칭 감고, 교육민주화의 이름으로 교사의 손발을 묶고, 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괴물 법관을 양산했다. 그럼에도 민주공화국의 핵심 소프트웨어인 시민적 덕성과 직업윤리, 그 모태인 종교를 경시해 버렸으니 총체적 저질화는 필연의 결과였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 시장에서 생사를 걸고 경쟁한 우리 기업들이 2류에서 1.5류로 올라왔다면, 철저한 국내 독과점 구조하에 있는 정치는 점점 더 많은 자원(예산과 인력 등)을 빨아들이면서도 오히려 3류에서 4류로 주저 앉았다. 바다에 쟁기질을 한 이유를 아는 사람, 아픈 만큼 성숙한 혁명가들의 역사적 역할이 필요하다. 낡고 썩은 운동권·민주주의를 재건축 수준으로 리모델링하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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