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글쟁이 탤런트’ 김수미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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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 담은 옛 산문은 우리 문학의 숨은 보배
문학이 죽은 시대, 싱싱한 날것의 언어 선봬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0-31 06:30:58

며칠 전 가수 조영남과 통화했다. 그와는 30년 동안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형, 탤런트 김수미를 어떻게 생각해? 예전에 왜 한 번 티격태격했잖아.” “요즘 우린 최상이야. 더 이상 좋을 수 없어. 근데 왜?” “TV 보다가 김수미에 확 빨려들어 갔어. 내가 볼 때 입담과 순발력 좋은 김수미가 앞으로 5~10년 예능프로 강자 노릇을 할 거야.” “맞아, 이미 그러고 있는데 뭘.”

내 판단은 tvN ‘회장님네 사람들’과 다른 걸 지켜본 결론이다. 요즘 제2 전성기인 김수미의 매력은 무엇보다 위선 떨지 않는 점이다. 말과 행동이 분명 거친데도 그게 썩 자연스럽다. 그리고 요즘 통한다.

조영남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형, 그거 알아? 김수미가 실은 숨은 글쟁이야. 펴낸 책도 장편소설을 포함해 무려 열 권이야. 형이 삽교중학교에서 문예반장 했듯이 김수미도 숭의여중 문예반장 출신이고….” “오, 그래? 난 전혀 몰랐어.”

조영남의 중학 시절 빛나는 이력이 문예반장이다. 그 얘기만 꺼내면 흥분한다. 희한하게도 김수미가 가진 꼭 닮은꼴의 경력을 조영남조차 모른다. 다른 이들도 그렇다. 고정관념 탓에 김수미 삶의 핵심 하나를 애써 무시해 온 셈일까? “내 어릴 적 꿈은 작가다. 그래서 서울대 국문과를 지망했다가 재수를 거쳐 서강대 국문과에 합격했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는 못 다녔지만….”

이참에 고백하자. 김수미는 그냥 글 잘 쓰는 탤런트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굳이 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그의 글은 우리 시대 산문을 꼽을 때도 뺄 수 없는, 그런 종류다. 그가 1990년대 이후 펴낸 산문집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샘터·1993년) 등을 읽고 내린 중간 결론이다. 얘길 마저 하자.

나는 근현대 산문의 최고봉으로 염상섭을 꼽고, 여성작가 박완서 문학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오염되지 않은 전라도 사투리를 날것 그대로 구사하는 김수미의 산문도 동시대의 글을 말할 때 빼선 안 된다. 문학·비문학 장르 구분 없이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당황할 것이다. 교과서에서 보아 온 산문과 시만이 정통이라고 믿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터놓고 말해 그건 교과서 권력이 만든 결과다. 그럼 김수미의 산문은 뭘까? 그런 데서 슬쩍 비껴선 장외(場外) 문학이다. 물론 그의 글은 체계적 훈련을 받지 않은 탓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다. 피아니스트로 치면 연주 때 악보에서 음표 곳곳을 뭉텅뭉텅 빼먹는 셈이다. 그런데도 우릴 사로잡는다. 일테면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등 몇몇 산문은 썩 인상적이다.

거기 나오는 1950년대 고향 전북 군산의 풍경과 아버지에 관한 회고는 단편소설 그 이상이다. 스토린 이렇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던 꼬마 김수미가 진흙탕 물을 뒤집어쓴 채 장터에서 쓰러져 자는 주정뱅이를 발견했다. 헐, 아버지였다. 전봇대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게 하던 차에 아버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불룩 튀어나온 게 보였다. 사 달라고 그토록 노래 불렀던 분홍색 필통! 꼬마 김수미는 뻑 간다. 나이 들어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부지! 당신이 거름지게를 지고 가파른 언덕을 수십 번 올라 다니며 막내딸처럼 키운 시금치 열 포대 값이 쌀 두 되 값도 안 돼서 그만 소주 사고 필통 사고 그렇게 장바닥에서 주무셨던 것이지요? (그 직후) 주전자 들고 (아버지 술심부름을) 간 저에게 ‘외상술 더 못 줘!’하며 유리 창문이 깨지게 처닫던 삼거리 곱추 아줌마가 미워서 저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간첩 잡아 포상금 좀 타게 해 달라고.”

아버지 약주 받아 드리려던 막내딸 김수미의 소원은 드디어 이뤄졌다. 며칠 뒤 산 깊은 곳 간첩 접선 현장을 잡은 것이다. 신고하러 시내 경찰서를 향해 미친 듯 뛰어갔다. 그렇게 내달리던 꼬마 김수미의 눈에 술 도매집 앞에 산처럼 쌓아 둔 소주 궤짝 더미가 들어왔다. 그걸 곁눈으로 힐끗 보며 “입이 찢어져라 웃음이 나왔다”고 그는 썼다. 대단한 디테일이고 묘사력이다.

여기서 반전. 그건 간첩 접선이 아니라 산속에서 술 마시려던 아저씨 무리였다. 허위 신고한 꼴의 김수미는 아버지로부터 아카시아 나뭇가지로 흠씬 얻어터졌다. 지금도 화장을 지우면 얼굴에 그날의 상처가 남아 있단다. 어떠신가? 당시 아버지와 딸의 얘기는 글맛 짱이다. 반공에 죽고 살던 그 시절 풍속사로도 모자람이 없다. 글의 엔딩이 끝내 콧날을 시큰하게 한다.

“아부지, 그때 간첩을 잡았어야 아부지께 술 받아드릴 기회였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가셨습니까?” 나는 안다. 지금의 김수미를 지탱하는 힘, 70대인 그를 예능의 강자로 군림하도록 하는 저력은 외롭게 닦아 온 글의 힘이다. 말과 글은 여전히 콘텐츠의 제왕이니까. 그건 문학이 죽은 지금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다음 주 한 번 더 김수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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