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김규나 연재 소설 ‘최초의 당신’ [32] 너는 내 첫 키스야
이 순간을 기회로 만드는 건 당신의 선택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19 06:30:10
 
 
아이는 나와 교실에 단둘만 있는 것처럼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붉은 혀로 자신의 윗입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핥았다. 열한 살 여자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당돌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어떤 장난기나 천박함은 단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건 내가 소설 속에 써 놓은 문장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장면 그대로를 기억하고 재현한 아이는 그제야 자신으로 돌아온 듯 꽃잎처럼 입술을 다무는가 싶더니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아이의 두 뺨은 막 피어난 영산홍처럼, 소설 속 내 문장처럼 발갛게 상기되었다.
 
너는 내 첫 키스야.”
 
그 아이가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대고 속삭였다. 아이의 더운 숨결이 내 귀를 간질였다. 입을 맞출 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는데 그 순간 정수리서부터 발끝까지 수천 볼트의  전류가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떨었다. 그런 내 상태를 알 리 없는 아이는 의자 위에 올라서더니 반 아이들을 향해 당당하게 선포함으로써 교실의 소란과 흥분을 평정했다.
 
소설가는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 거야.”
 
반 아이들 앞에서 나를 소설가로 천명한 것이었다. 내가 소설을 쓰든 말든 아이들에게는 상관없었을 테지만 그날 이후 나는 소설가로 불렸다.
 
나는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첫 입맞춤이 황홀한 것인지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주목받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무르익지 않은 소설을 그 아이가 읽었다는 것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른들이 쓴 소설의 문체를 흉내 내어 그 아이를 상상하며 썼던 조잡하고 은밀한 문장들이 내 눈앞에서 비루하게 날갯짓을 하다 교실 바닥에 함부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아이의 손에서 공책을 낚아채 교실을 뛰쳐나갔다. 공책을 꼭 움켜쥐고 복도를 맹렬히 뛰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소중하고 순수한 내 안의 무언가가 마구 짓밟힌 것 같았다. 내가 멈춰 선 곳은 쓰레기 소각장 앞이었다. 불이 활활 벌겋게 타오르며 매운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대신,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나는 빠르게 기억의 문을 닫고 정하운에게 물었다. 나는 경계했다. 그동안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행운이 내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세상엔 절대 공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술이나 실력이 아닌 우연과 확률을 담보로 하는 승부에서 나는 언제나 잃었다.
 
강무훤 씨가 죽지 않길 바라는 겁니다. 살아서 당신의 삶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거예요.”
 
그녀가 두 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재단 측의 모든 지시를 따른다, 생존 시 사안에 대한 비밀을 엄수한다, 사망 시 모든 기록은 파기되며 시신은 미리 작성된 유언 절차에 따라 재단에서 처리한다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였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이 순간을 기회로 만드는 건 오직 당신의 선택입니다.”
정하운이 동의서 위에 펜을 올려놓았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내 시신입니까?”
비밀을 캐고 싶어 빠른 적출 수술을 권유하던 종합병원 의사를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강무훤 씨는 의심이 많군요. 나쁘진 않네요.”
 
정하운이 살짝 미소 지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43
좋아요
27
감동이에요
7
화나요
0
슬퍼요
1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